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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Jan 03. 2022

금지된 언어, 통속어 1

저렇게 말하는 인간이 대통령이라니     


어떤 말들은 사람들을 천천히 파멸로 이끈다. 이 말들은 모래처럼 쌓이고 쌓이다 이윽고 늪을 이루고 말들의 주인을 천천히 가라앉힌다. 설령 그 말의 주인이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도 파멸을 막을 수 없다. 아래의 여러 장면들이 증명한 것처럼.      


장면 1: “거지 같은 경험을 했어.” -1974년 4월 미국, 닉슨 대통령     


 1974년 닉슨 대통령이 그의 보좌관들과 워터게이트를 막기 위해 보좌관들과 모의한 비밀 녹취록이 공개되었다. 대화의 내용만큼이나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닉슨의 말하기 방식이었다. 세계의 지도자라는 닉슨의 말은 상스러움이 묻어났다. 닉슨과 측근들과의 대화는 ‘말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인들은 닉스의 말의 그 내용이든 형식이든 ‘거지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겠지. 아, 저렇게 말하는 인간이 대통령이라니.      


장면 2: “이쯤...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 2003년 3월 한국,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들에게 웃으며 이 말을 던졌을 때, 그는 이 말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 말은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말로 변형되어 재생산되었고, ‘대통령 못 해 먹겠다’라는 발언들과 함께 그에게 ‘막말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못 해 먹겠다’는 그에게 야당은 탄핵 소추를 선물했다.      


장면 3: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한다” - 2015년 5월 한국, 박근혜 대통령     


2017년, 한국인들은 모두 언어학자가 되어 대통령의 말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박근혜 번역기’라는 패러디까지 등장하고, 언론과 여론은 대통령의 발화에 ‘해석 불가능’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의 말은 국정농단이라는 사건과 함께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명확한 근거였다.      


위에서 언급한 세 사람 말고도 ‘저렇게 말하는 인간이 대통령이라니’라는 범주에 들어갈 최고 권력자는 전세계에 널리고 널렸다. 이쯤 되면 ‘저렇게 말해야만’ 대통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저렇게 말하는’ 게 정말 파멸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인 실수인 것일까?     


이집트에서      


앞서 던져진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잠시 짬을 내서 이집트로 가보자. 1950년대 찰스 퍼거슨이라는 남자는 이집트에서 투탕카멘의 미라가 아닌 새로운 언어적 사실을 발굴해 낸다. 그가 발굴한 언어적 사실은 바로 양층 언어 상황(diglossia), 즉 이집트에서 사용되는 아랍어가 두 개의 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먼저 위층의 아랍어 ‘프스하’. 상위어(High variety)에 해당하는 이 아랍어는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에서 사용되는 고전 아랍어에 바탕한 것으로, 설교, 강의, 뉴스, 법률, 정치적 발언 등 공식적인 상황에서 사용된다. 이집트 사람들은 현대 표준 아랍어인 이 프스하로 책을 쓰고 읽는다. 이를테면 프스하는 공식 석상의 언어이자 글말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아래층은? 하위어(Low variety)에 해당하는 말은 ‘암미야’이다. 만약 당신이 이집트 길거리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면, 프스하가 아닌 암미야를 사용해야 한다. 구어체 아랍어라고 할 수 있는 암미야는 사적인 자리에서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이야기할 때 쓰이는 일상의 언어이다. 


이렇게 상위어와 하위어가 사용 영역이 엄격히 분리되는 언어공동체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어떤 언어공동체에서는 한 언어에 속한 다른 변종들이 상위어와 하위어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지만(스위스에서의 표준 독일어와 스위스 독일어) 어떤 경우는 다른 두 언어가 상위어와 하위어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파라과이의 스페인어와 과라니어)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은 양층 언어 상황일까?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한국은 단일 언어 사회인데 어디서 약을 팔고 있냐고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언어학자들도 대부분은 아니라고 단언하거나(사회언어학 개론서에는 한국은 양층 언어 사회가 아니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들의 유입으로 인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설명하고 있다.), 뭐가 찜찜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일 것이다. 


우리는 ‘국어’로 표상되는 단일한 언어를 사용한다. 뭐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당신은 지방의 학교에서 선생님께 낭랑한 표준어로 대답하던 아이들이 자기 친구에게 진한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 친동생에게 영어 과외를 해주다가 못해 먹겠다고 생각하고 그만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제주말을 써서 동생에게 영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표준어로 강의를 해야 뭔가 잘 풀릴 것 같은데, 제주말로 수업을 하니 선생 역할을 하는 나도 학생인 동생도 모두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교양 있고 우아한 서울 사람들은 다르지 않을까? 다시 말해 공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도 서울 사람들은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회의를 진행할 때 동료를 이성과 합리의 화신처럼 보이게 하던 동료의 언어가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돌변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한 바 있다. 회의 석상에서의 동료의 말은 ‘국어’의 표상에 가까웠으나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의 동료의 말은 이상적인 ‘국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래서 한국은 양층 언어 사회냐고? 잠시만 기다려보라. 우리는 단일언어를 사용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같은 장면,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는 모두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가정된다. 그 언어는 표준어로 표상되는 ‘국어’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국어의 이상과는 다소 또는 많은 거리가 있는 ‘뭔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언어의 이름은?     


은폐된 이름 X     


그 언어의 이름은 은폐되어 있다. 아니 그 언어는 은폐되어 있다. 그러니 그 언어를 일단 X라고 하자. X라고 하는 이유는 X에게 너무나 많은 이름이 붙기 때문이다. 예상했겠지만 이 언어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는 까닭은 X가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프로그램이 작동되지 않는 것을 보고 ‘에라가 나다’(에러가 아니라)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그래서 ‘멘붕’이 올 수도 있으며 ‘내가 컴퓨터 실력 빼면 시체인데’라며 좌절할 수도 있다. 옷은 ‘뽀인뜨’를 살려 입어야 한다. ‘에라’, ‘멘붕’, ‘뭐 빼면 시체이다’, ‘뽀인뜨’. 이런 언어들이 X다. 


그렇다면 이 X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X의 한국어 명칭은 정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X의 영문명을 먼저 살펴보자. X는 영어로 버내큘러(vernacular)라고 한다. 학자들은 이 버내큘러라는 용어를 ‘일상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사투리’, ‘속어’, 더 나아가 ‘비표준형’, ‘낙인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속이 좀 시워해지셨는지? 아닐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에서 X의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일 것이다.


X, 즉 버내큘러를 일상어라고 하든, 사투리라고 부르든,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버내큘러가 표준어 또는 언어 표준과의 긴장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긴장 관계 안에서 버내큘러는 크게 세 가지 성격을 드러낸다. 


첫 번째는 ‘일상어’로서의 성격이다. 일상어란 무엇인가? 일상어는 언어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언어, 즉 ‘각 잡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다. 버내큘러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소통 가능성과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따진다. 다시 말해 버내큘러는 그 말이 표준형인지 아닌지, 격식을 갖춘 것인지의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기준을 적용해 생각해 보면 특정 지역의 경우 그 지역의 방언이 버내큘러가 되고, 서울에 거주하는 이라면 일상에서 편하게 사용하는 말이 버내큘러가 될 것이다. 


버내큘러의 두 번째 성격은 ‘통속성’이다. 여기서 통속은 일반 대중의 일상적인 삶을 가리킨다. 대중들은 소통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그것의 어원이나 형식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 사용한다. 예컨대 대중은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저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빠지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이야기하겠지. ‘난 먹튀가 싫어.’ 대중의 입장에서 말이라는 그저 잘 통하고 자신들의 삶을 잘 표현해줄 수 있으면 ‘장땡’이다.


버내큘러가 가진 마지막 특징은 ‘구어’로서의 성격이다. 버내큘러는 일상의 의사소통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며 이는 버내큘러가 즉각적인 대면 의사소통 상황에서 사용되는 언어, 즉 구어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버내큘러는 구어로 실현된다. 구어로 실현된다는 것은 버내큘러가 단순히 어휘 차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버내큘러는 버스[뻐스], 센티[센치]와 같은 발음의 차원에서부터, ‘쌩얼’, ‘훈남’과 같은 어휘 차원, ‘미치고 팔짝 뛰다’, ‘x가 밥 먹여 주나’와 같은 관용구나 문장 차원, 더 나아가 대화의 전개 방식에서도 실현된다.  


그렇다면 버내큘러, X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나는 X라는 언어의 사용자인 일반 대중과 대중의 일상적 삶에 주목하여 ‘통속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통속어라는 말 속에는 대중이라는 언어 사용자, 대중의 일상적 삶이라는 언어 사용 장면, 대중의 의사소통 양식인 ‘구어’의 속성까지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X에 통속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은 또 다른 이유는 버내큘러가 위세가 약한 언어, 기층의 언어, 일종의 은폐된 언어임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에서 ‘에라가 났다’라고 제일 많이 말하겠지만, 만약 같은 말을 방송이라는 공식적 상황에서 하게 된다면 뭔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예능 방송 프로그램이었다면 이를 웃음의 소재로 다룰 것이다. 이처럼 통속어는 가장 많이 쓰이지만, 위세가 약하며 심지어 그 사용자들은 통속어를 온전한 언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1996년 미국 오클랜드 교육위원회에서 소위 흑인 영어, 또는 AAVE(African American Vernacular English)라고 불리는 통속어를 표준 영어 학습 촉진을 위해 교육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자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킨 것도 이런 모순 때문이었다. 미국 흑인 영어는 결함이 있는 언어가 아니라 영어의 많은 변이형 중 하나이며, 사용되는 상황과 대상이 다른 언어일 뿐이지만, 미국의 일반 대중은 AAVE를 온전한 언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두가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깊숙이 은폐되어 있는 모순의 언어, 보여도 보이지 않는 언어가 바로 통속어인 것이다. 그리고 이 통속어는 한국어 언어공동체에서 아래층의 언어로 기능한다. 물론 한국인들은 자신들

이 상층의 언어만을 사용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철저한 동질화와 평준화를 추진하는 ‘국어’라는 체제, 다시 말해 국가의 모든 성원이 모든 장면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받는 ‘국어’ 체제에서 통속어가 노출되는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리는 그런 사례를 이미 익히 알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두 한국 대통령의 사례가 그러하다.


일단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이 글은 <백승주(2017), 정치 담화에 나타나는 ‘통속어’에 대한 언론의 담론 구축 양상 연구, 기호학연구 52권, 한국기호학회>를 바탕으로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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