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란 언제일까? 어떤 선택이 그 이후의 삶의 방향을 결정했으리라 여겨지는 바로 그때 말이다. 여러 순간들이 있었겠지만,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병무청 신체 검사장에서 받아 본 '로르샤흐 테스트'의 얼룩 무늬다.
그날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이들이 검사장을 하나둘 떠나던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검사관에게 호명된 나와 몇몇은 예외였다. 남은 이들에게는 정신 건강을 묻는 설문지가 주어졌다. 온갖 파괴적인 충동이 있었는지 묻는 문항이 줄을 이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싶었지만, 나는 조용히 그런 적 없음에 체크를 해나갔다. 그러다 약식의 로르샤흐 테스트를 만났다. 데칼코마니 모양의 잉크 얼룩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묻는 사지선다형 문제. 딱 봐도 사람 머리 깨진 거네. 이상하게도 그 문제 앞에서 잠시 망설였던 것 같다. 그냥 깨진 머리로 할까? 그러나 나는 얌전히 '나비'에 표시를 하고 설문지를 제출했다.
만약 그때 내가 그 얼룩 무늬를 사람의 깨진 머리라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해본다. 국가가 원하지 않는 '자아'를 가진 이로 분류된 자.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하여 나만의 파괴적인 서사를 구성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서사의 유혹은 나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어떤 자아를 가졌더라? 지금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울을 보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누구냐 넌? 설날 연휴 내내 절제하지 못하고 과음과 과식을 한 탓에 한계를 모르고 부풀어 오르는 얼굴과 배를 보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아니다 맞다. 나는 할 일을 쌓아놓고 걱정만 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는 나를 보면서 묻는다. 누구냐 넌? 물론 처음 해보는 요리에 성공하고 나서도 자랑스럽게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누구냐 넌?
정신을 차려본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세상에 던져져 있다. 여기서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묻고 또 묻지만 여전히 나는 모호함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계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자신과 세계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지를 규정하는 이야기를 거부하기 힘들다. 많은 소설과 영화가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유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깨닫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주나 손금, 별자리에서 손쉽게 우리들의 운명이 담긴 이야기를 찾는다. 나 또한 그런 이야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처음은 손금이었다. 손금을 잘 본다는 한 선배가 내 손금을 보더니 대뜸 이런 말을 던졌다. '너는 손재주가 좋은데 손에서 돈이 새는구나.' 허허 웃으며 지나쳤지만 며칠 뒤 그의 예언은 실제로 실현되었다. 구한 지 한 달도 안 된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다. 누구는 지나가던 스님이 나라를 구할 운명이라고 말해준다는데 나는 고작 손에서 돈이 새는 운명을 가졌다니… 그때 내가 손바닥에 왕(王) 자를 써서 운명을 바꾸는 기술을 알았더라면, 손에 돈 전(錢) 자를 문신으로 새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당시에 나는 그런 신공을 몰랐다. 그 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돈 세는 손이 아니라 돈 새는 손을 가진 것을 한탄하며 살았다.
그다음으로 내게 찾아온 이야기는 요즘 온 국민이 열광하는 과학적 미신이다. 맞다, 그 검사. 주류 과학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MBTI. 하지만 요즘 카페에서 사람을 뽑을 때 이용하고, 기업들도 자기소개서에 기록할 것을 요구하는 검사. 나는 대학의 심리 상담 기관에서 INTP 유형으로 판정을 받았다. 여기까지 읽고 MBTI에 통달한 이들은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근래 화제가 되고 있는 카페의 구인공고에 따르면 INTP는 아예 지원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형을 대표하는 키워드인 '논리적인 사색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뭔가 세상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게도 이 세상에서 연기할 일종의 '배역'이 생긴 것이다. 배역 없이 떠돌던 무명 배우가 처음으로 캐스팅된 기쁨이 이렇지 않을까? 우리가 행하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의미 없는 일상의 행위들은 이제 '열정적인 중재자', '선의의 옹호자', '사교적인 외교관', '재기발랄한 활동가' 등의 사회적인 역할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말싸움을 벌일 때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나 종일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는 행위들은 모두 내가 '논리적인 사색가'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 때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은 도리어 우리를 안심시킨다. MBTI가 사주나 별자리 운세 같은 다른 운명의 이야기보다 더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MBTI가 인기가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유형을 규정하는 '논리적인 사색가'와 같은 표현들이 'A는 B이다'라는 은유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은유는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틀이다. 은유는 낯설고 추상적인 것(A)을 우리에게 익숙하고 구체적인 것(B)과 연결시킨다. '너희 회사 상사 어때?'라는 질문에 '그 인간 완전 히틀러야'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정 인물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은유란 모르는 것과 이해 가능한 것을 연결시켜 주는 고속도로다. 이렇게 흐릿하고 이해할 수 없던 자아 '나'는 '논리적인 사색가'라는 구체적인 역할과 연결되어 갑자기 기적처럼 이해 가능한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도 MBTI는 손쉬운 자아 쇼핑을 가능하게 한다. 자아와 사회를 탐구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이런 노력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언제나 실패한다. 그러나 MBTI는 그러한 고통을 깔끔하게 없애준다. 우리는 그저 16개의 규격화된 기성품 자아 중 하나를 손쉽게 고르면 되기 때문이다. 작가 오후는 한국에서 MBTI가 인기를 얻는 이유가 규격화이고, 이 규격화는 집단주의 성향과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한다. 여기에 내 의견을 조금 덧붙여 보자. 규격화의 핵심은 미리 가공하여(ready-made) 어디로든지 유통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속성은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더 강화된다. 우리는 MBTI에서 구입한 자아를 사이버 공간에 전시하고 남들의 그것과 비교한다. 이 과정에서 덤으로 우리는 기성품 자아를 공유하는 공동체도 얻게 된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저기 어딘가에는 나와 같은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럼 이게 정말 '자아'인가?)
사회 심리학자 존 페트로첼리는 MBTI가 본래 일종의 게임으로 개발되었다고 말한다. 한때 나도 MBTI를 과학적 검사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일종의 놀이로 받아들인다. 게임 속 16개의 캐릭터 중 나의 캐릭터가 있고, 이 캐릭터를 남들과 비교하면서 하는 놀이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초등학생 아들과 서로의 MBTI 유형을 묻고, 같은 유형에 어떤 유명인들이 있는지 확인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게임 속 캐릭터가 실제 세계로 나오면 어떻게 될까? 게임 속 총잡이 캐릭터를 플레이하던 이가 과몰입하여 실제 현실에서 총을 난사한다면? 마찬가지다. 과학으로 포장된 잘못된 믿음이 현실에서 실현될 때, 그 현실은 아수라장이 된다.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을 학살한 골상학처럼.
MBTI의 16가지 기성품 자아를 쭉 한번 살펴본다. 이 기성품 중에서 '나'는 없다. 당신들의 자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까지 썼으니 이제 논리적인 사색은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