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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Apr 29. 2022

장애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게티이미지뱅크



바퀴는 아름답다. 가장 완벽한 형상을 가진 이 물건으로 인해 인류의 진화는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바꾼 사건으로 뉴턴의 만유인력 발견이나 잡스의 스마트폰 발명을 거론하는데 모두 어리석은 소리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최대의 사건을 딱 하나 뽑으라면 그건 '휠체어 혁명'이다. 거추장스러운 다리 대신 휠체어를 우리 신체의 일부로 확장시킨 혁명 말이다.


우리는 더 이상 걷지 않는다. 걸음을 포기하자 인류는 '아름답게 이동하는 문명'을 건설해냈다. 도시의 건물, 도로 등 모든 시설물은 휠체어 혁명에 맞춰 다시 구축되었다. 이제 우리는 자동차든 지하철이든 모두 휠체어를 타고 오르내린다. 기술의 발전은 휠체어의 바퀴를 어떤 모양으로든 변형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인간은 에베레스트, 사막, 바닷속 지구상 어디에서나, 아니 저 우주 공간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계단'이란 단어는 멸종되었다. 실제로 어린 세대들은 '계단'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모른 채 이 말을 욕설로 사용한다.    


이동은 인간의 본성이다. 실제로 인간의 언어는 '인생은 여행이다'와 같은 이동에 관한 은유로 가득하다. 그 본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육체가 머물러 있으면 정신의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라도 이동하고자 한다. 그런 인류에게 휠체어 혁명은 자신의 본성에 맞는 충만한 삶을 선물했다.


그런데 이런 선물을 거부하는 무리가 있다. 두 다리로 걷는 것을 고수하는 장애인들 말이다. 최근 이들은 출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시위를 벌여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장애인이 출근 시간에 나타나 비효율적으로 걸어 다니며 휠체어의 통행 흐름을 막는 것도 염치없는 짓인데, 단체로 시위라니. 지하철 환경을 바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또 얼마나 기가 막힌지.

ⓒ게티이미지뱅크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요구인지 여러분은 잘 알 것이다. 진화의 여정을 걷던 어느 순간 인간은 꼬리를 포기했다. 지하철에서 두 다리로 걷게 해달라는 장애인들의 주장은 사라진 꼬리를 다시 달고 다니겠다고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두 다리로 뭘 하려는가? 철봉에 다리 걸고 매달리기?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두 발로 걷는 자들은 격리되고 도태되어야 한다.


휠체어를 타는 게 비장애인이고, 두 다리로 걸으면 장애인이 되는 평행 우주를 상상해보라. 머릿속으로 이런 평행 우주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수어가 아닌 음성 언어로 대화를 하면 장애인으로 취급받는 우주. 청각이나 촉각에 의지하지 않고 시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움직이는 것이 장애가 되는 우주. 아무튼 여러분은 방금 그 우주에서 휠체어를 탄 비장애인이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에 분노하면서 혐오로 쓴 글을 읽었다. 이 사고 실험을 통해서 묻고자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장애는 어떤 사람이 가진 고유한 속성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인가?


장애학 연구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 '장애학의 도전'을 쓴 저자 김도현은 '흑인은 흑인일 뿐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흑인은 노예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며 손상은 손상일 뿐이며,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관계 속에서만 손상은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장애란 사회적 구성물이다.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평행 우주라지만 두 다리 멀쩡한 것이 어떻게 장애가 되겠어? 아니, 우리 우주에서도 두 다리를 이용해 걷는 것은 장애가 될 수 있다. 도로 설계에서 보행자를 배제하고 차량의 동선만을 중시했던 브라질리아의 사례가 그렇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상적인 계획도시 브라질리아지만 자동차가 없는 사람에게 그곳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클라리사 토신 작 '걸음으로 만든 브라질리아'. 인공위성에서 찍은 브라질리아 도심. 사진에서 보이는 선들은 사람들이 걸어다녀서 만들어진 길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브라질리아의 한가운데, 인도가 없는 8차선 도로 길가에 당신이 서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거대한 도심을 가로질러야 하지만 차가 없다. 여러 표지판과 신호로 구성된 텍스트들이 보이지만 그것들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 운전자를 위한 것이다. 보행자인 당신을 위해 작동하는 텍스트는 없다. 그래서 깨달은 것? 이곳에서는 자동차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당신에게 결핍이자 손상이 된다. 운전자들의 시선이 당신에게 꽂힌다. 그 시선은 당신이 그 공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몸이라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당신은 이동 불능이라는 장애를 가진 존재가 된다.

당신이 이동 불능의 존재가 된 이유는 당신에게 내재한 어떤 성질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브라질리아라는 도시와 보행자가 맺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애초 브라질리아라는 도시가 관계를 맺기로 결정한 상대는 자동차를 탄 시민이지 자동차가 없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이동 시스템과 보행자들이 맺을 수 있는 관계란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관계뿐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구성원들이 지난달 14일 서울시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탑승해 광화문역까지 이동하며 장애인 대중교통 이동권 보장 촉구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스1




도시라는 공간은 다층적인 텍스트들과 기호들의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도시라는 공간을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그 텍스트와 기호들과 상호작용하며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고 읽어낸다. 지하철이란 공간을 생각해보자. 지하철의 주요 기능은 이동이다. 이동이라는 기능은 지하철 이용자가 지하철 역사로 진입했다고 자동적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이동은 지하철 이용자가 지하철의 표지판, 화살표, 픽토그램, 사진 등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텍스트들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지하철이란 공간의 텍스트들은 대부분 비장애인의 '보편적인 신체조건'과 '정상적인 걸음 속도'에서만 읽어 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만약 지하철이 상정한 보편과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면 이용자 고유의 정체성은 박탈당한다. 그들은 그저 부적절한 공간에 위치한 신체로서만 규정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많은 장애인들에게 지하철은 읽히지 않고 기능하지도 않는 공간이 된다.


장애는 고유한 속성이 아니며,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보자. 이 관계는 텍스트의 배타적인 구성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다. 즉 장애란 읽어 낼 수 없는 텍스트, 기능하지 않는 텍스트를 특정 공간에 배치하는 것에서도 만들어진다. 투표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선거공보물이라는 텍스트를 읽어 냄으로써, 투표장에서 투표용지를 읽고 도장을 찍음으로써 한 사람의 유권자가 된다. 그러나 읽어 낼 수 없는 오탈자로 가득한 점자 공보물은 시각장애인이 유권자가 되는 것을 막는다. 발달장애인이 투표장에서 그림이나 사진이 없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는 투표용지를 받았을 때, 그는 유권자가 아니라 등장하면 안 될 장소에 나타난 불청객이 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벌인 지하철에서의 이동권 보장 시위를 서울교통공사가 불법시위로 규정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고 한다. 개선을 요구했지만 몇 달 뒤 이루어질 지방선거에서 장애인들의 참정권이 제대로 지켜질지는 미지수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차별과 억압이라는 연료를 통해 끊임없이 장애를 생산하고 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3171017000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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