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기적을 일으킨다. 7년 전 그날의 학술대회장에서도 그랬다. 많은 비가 내리는 날씨였지만 학술대회장은 성황이었다. 내 발표가 예정되어 있는 소강당 안에도 청중이 꽤 많이 앉아 있었다. 오늘은 흥행이 좀 되겠는걸. 내가 두 번째 발표이니, 첫 번째 발표가 진행될 동안 청중들이 어떤 질문을 할지 미리 생각 좀 해보자.
경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첫 번째 발표자의 인사와 함께 박수 소리가 강당을 메웠다. 다음은 내 차례. 긴장된 마음 반, 기대감 반으로 연단에 올라 컴퓨터를 점검했다. 발표 슬라이드가 스크린에 뜨는 것을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리를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뭘까? 발표 보이콧?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보이콧은 아니었다. 영화 상영이 모두 끝난 다음에 극장을 나서는 이들의 얼굴이었으니까. 여러분, 아직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아니 제 발표가 남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미소를 지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학회 분과에는 보통 2명에서 3명의 발표자가 배치되고 통상 1시간이 넘게 발표가 진행되기 때문에 청중들이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처럼 분과가 진행되는 중간에 대규모의 청중이 일제히 자리를 뜨는 장엄한 풍경은 처음이었다.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다 학술대회 프로그램 안내문 속 발표자들의 소속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내 분과의 첫 번째 발표자는 '인 서울'의 유명 사립대 소속, 두 번째 발표자인 나는 '아웃 서울'의 지방대 소속.
장내가 정리되었다. 원래 있던 소강당 안에 있던 인원은 10분의 1로 줄어 있었다. 띄엄띄엄 가뭄의 콩처럼 앉아 있는 이들도 거의 나와 안면이 있는 연구자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또 한 번 기적을 일으켰구나. 지방대 소속이 아닌 서울의 사립대 소속 연구자로 학회에서 발표하던 시절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기적. 하지만 살면서 너무나 자주 경험했던 그런 기적.
기적을 일으키는 나의 능력은 내가 고향의 지방국립대에 입학하던 그 순간부터 가지게 된 것이다. 대학 시절, 서울대로 진학한 고교 선배에게 그가 방학 때 하던 과외를 물려받은 적이 있었다. 첫 달 수업을 끝내고 처음으로 과외비를 받았을 때, 나는 내가 받은 액수가 서울대 다니던 선배가 받은 돈의 절반이 되는 기적을 경험했다. 몇 달 동안 과외를 하며 학생의 성적을 비약적으로 높여 주었지만, 여전히 그 기적은 멈출 줄 몰랐다. 부모님, 이 친구 성적은 그 선배가 아닌 제가 올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의 부모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역시! 서울대생에게 과외를 받더니 우리 애 성적이 올랐어.
학회장의 청중들을 망설임 하나 없이 기꺼이 발표장에서 떠나게 하고, 받아야 할 과외비의 액수가 반으로 줄어들게 하는 기적 외에도, 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일순간 깨고 얼음과도 같은 침묵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석사 학위를 마치고 같은 석사 과정 졸업생들과 어느 언어교육 기관의 교수들에게 논문을 돌리고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우리가 방문한 교수는 석사 논문을 드리러 왔다는 말에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차를 마시며 교수는 자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일행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셨어요? 그래요? 좋은 주제네요. 그런데 선생님은 학부 어디 나오셨나요? 아, 좋은 학교 좋은 학과 나오셨네요. 거기 누구누구 교수를 내가 잘 알잖아? 하하. 교수는 논문 주제와 졸업 학부를 화제로 일행들에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곧 기적을 행할 것을 예감해서였을까, 나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 교수는 논문 주제가 아닌 내가 어느 학부 출신인지를 먼저 물었다. 그리고 나의 대답. 그 대답은 어김없이 기적을 일으켰다. 교수는 활짝 보여 주던 미소를 순식간에 걷어갔다. 그리고 침묵. 또 침묵.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그 순간을 나는 정말 얼음처럼 차가웠다고 기억한다. 교수는 내 논문 주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아니 나의 대답 이후 그는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가 보다 못해 말했다. 선생님, 저희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여전히 교수는 별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우리는 자리를 떴다. 오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느낌으로, 아니 나 자체가 오물이 된 느낌으로 대학의 교정을 걸어 나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놈의 기적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몰라서 그 이후로도 나는 수시로 내가 일으킨 기적의 순간을 목격해야 했다. 기억한다. 서울 신촌의 과외 알선 업소에 서류를 제출하고 사무실을 나올 때 등 뒤에서 어이없다는 말과 함께 들려오던 웃음소리. 임용을 위한 면접 자리에서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구분이 안 가는 비아냥을 흥얼거리던 면접 위원들. 이런 기적들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의 기적을 설명할 단어를 찾은 것은 얼마 전 공부 모임에서 번역서의 역어를 논의하다가 '장소'와 '공간'의 개념에 대해 토론할 때였다. 이 두 용어는 학문 분야, 학자마다 각자 다르게 정의하지만, 내게 장소란 물리적 실체를 가리키고 공간이란 복잡다단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구성물을 뜻한다. 한날한시 우리는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장소는 각자에게 다른 공간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흑백분리법이 시행되던 1950년대 미국에서는 물리적 실체인 버스라는 '장소'를 백인 전용 칸과 유색인 칸으로 구분함으로써 인종차별의 '공간'을 구현했다.
버스를 백인 칸과 유색인 칸으로 구분하는 것도 모자라 화장실마저 따로 쓰게 하는 과거 미국의 인종차별이 기막히고 악랄하다고 생각하는가? 미안한 말이지만 시험 잘 보는 능력에 따라서 사람들을 분류하고 기꺼이 차별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지적 인종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에서도 과거 미국의 인종차별과 별반 다름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처럼 찌질하게 버스 칸을 나누거나 화장실을 분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우리는 어떤 장소에 있는 사람이 지적으로 열등한 인종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 장소를 통째로 차별과 혐오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통 큰 민족이다. 요컨대 내가 한국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핵심은 내가 가는 모든 장소를 순식간에 지적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차별과 혐오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에 있다.
나는 종종 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 버스의 백인 칸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 버스 안에서 '인 서울' 출신의 '지적 백인'들은 나에게 말한다. 거기는 당신 자리가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뒤로 꺼지시지. 아니, 그것은 지적 백인들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목소리를 내면화한 나의 목소리다. 나는 로자 파크스가 아니다.
1999년 11월 28일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의회 자유의 메달 수여행사에 참석해 미소를 짓고 잇는 로자 파크스의 모습. AP 연합뉴스
1955년 미국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백인 칸에서 일어나 뒤로 가라는 운전사의 명령을 거부하여 체포되었고, 그 사건은 미국 시민권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라는 버스의 승객들은 자신이 몇 번째 칸에 앉아 있든 관계없이 학력과 학벌에 기반한 차별을 당연한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다. 나중에 번복하기는 했지만 교육부가 차별금지법에서 학력과 관련된 조항을 빼자고 주장한 사례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지적 인종주의를 신봉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 우리는 지적 인종주의를 몸과 마음에 습속으로 새겨놓고 있다. 이 습속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7년 전 발표장을 웃으며 떠나던 이들은 '지방대 연구자의 발표는 들을 필요가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반응했을 뿐이다. 학벌이 좋은 선배의 과외비의 반에 해당하는 액수를 건넨 학부모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동일한 노동을 하고 더 큰 성과를 이루었지만 학벌이 좋은 사람이 더 큰 몫을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길 테니까. 나의 출신 학교를 듣고 방 안에서 뱀을 본 것처럼 얼어붙던 그 교수도 그저 강력하게 몸이 반응한 것일 뿐이다.
로자 파크스가 백인 남성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해 연행된 것은 1955년의 일이지만, 버스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사진은 '버스 보이콧' 사건을 알리기 위해 1년 후인 1956년에 연출한 사진이다. 파크스 뒤에는 기자가 동행했다. 앨라바마= AP 연합뉴스
그런 반응을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나는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 출신 학교가 밝혀질 때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것을 느낀다. 한국 사회가 내 몸에 각인시킨 반응이다. 나는 나의 출신이 밝혀질 때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 얼굴을 지워버린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나의 배움은 송두리째 부정되고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소거된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그저 지적으로 열등한 인종이 잘못된 버스 칸에 앉아 있는 광경뿐이다. 나의 신체적 반응은 그런 경험들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의 지적 인종주의는 능력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능력주의의 추종자들은 능력주의의 정당성을 '효율'과'합리'에서 찾는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차별이 작동하는 버스 안에 가두어 놓는 것이 과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지방대 출신이 정치를 할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논란을 벌이는 사회가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인가? 지적 인종주의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능력주의인지는, 한국의 지도층들이 자기 아이가 지적으로 열등한 인종으로 전락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막대한 사회적, 경제적 자본을 투입해 온갖 기상천외한 불법과 편법을 동원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지적 인종주의의 망상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서열을 따지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한국 사회. 그 버스 안의 풍경은 끔찍하다. 그래서 한국의 로자 파크스들은 말한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물론 이 법을 제정했다고 해서 내가 일으키는 기적이 단숨에 멈춰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법은 최소한 버스의 칸막이를 걷어내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 그냥 우리 모두, 함께 섞여 버스를 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