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방바닥에 누워 있다. 얼굴 위로 무심한 햇살과 함께 따분함이 밀려든다. 5월의 일요일. 집안은 조용하다. 부모님은 외출 중이고 동생들도 아침을 먹자마자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동네 공사판에서 적막을 토막 내려는 듯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소음이 멈추면 적막은 다시 집안 전체와 하나가 된다. 무료하지만 소년에게는 같이 놀 동네 친구 하나 없다. 그저 소년은 집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멍하니 들을 뿐이다.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 지나가면서 내는 신발 끄는 소리. 소리가 멈추면 적막함과 지루함은 더욱 깊어진다. 소년은 벽지의 문양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온갖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러다 소년은 한 여자아이를 떠올린다.
사실 그는 열 한 살 인생 최대의 혼란을 마주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소년의 눈에 자꾸 들어오던 같은 반 아이. 이제 소년은 그 아이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자꾸 지난겨울 합창 대회 때 학교 합창단이 갔던 식당이 떠오른다. 제주시 칼호텔 앞에 있는 북경반점. 여기서 저녁 먹고 가자. 합창단 선생님이 말한다. ‘우와!’하는 외침과 함께 아이들이 식당 안으로 몰려든다. 친한 애들끼리 앉으려는 걸 종업원이 막는다. 차례차례, 되는대로, 빨리빨리 앉으세요! 소년은 다른 아이들에 떠밀려 식당 입구 오른쪽에 있는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간다. 주춤주춤 계속 밀리다 소년은 그 방의 제일 구석진 테이블에 앉는다.
그리고 조금 후, 소년의 맞은편 자리에 여자아이가 앉는다. 소년은 믿을 수 없다. 여자아이가 소년을 보며 웃는다. 소년도 웃는다. 소년은 믿을 수 없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소년의 백일몽을 깨운다. 5월의 일요일 오전은 여전히 지루함을 분비하고 있다. 이러다 오후가 되면 일요일은 지루함이 아닌 왠지 모를 쓸쓸함을 분비할 것이다. 방안을 서성이던 소년의 눈에 공책이 들어온다. 공책을 보고 무엇인가를 결심하자, 소년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소년은 공책을 편다. 반듯하게 그어진 선들이 보인다. 소년의 가슴은 더 세차게 뛴다. 소년은 집안에 누군가 없는지 다시 확인한다. 한참을 망설인다. 그러다 소년은 두 글자를 꾹꾹 눌러 쓴다.
여자아이의 이름이다. 곧게 뻗은 줄 위에 서 있는 못난이 두 글자가 낯설고도 동시에 황홀해서 소년은 놀란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이름의 주인은 소년에게 웃지 않았다. 종이 위에 두 글자를 쓰면 이름의 주인이 나를 보며 다시 웃어줄지도 몰라. 문자를 새기는 것은 소년에게는 마법을 거는 일이다.
소년은 아직 창힐이라는 사내를 모른다. 중국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창힐이라는 사내는 문자, 즉 한자를 만든 이로 소개된다. 전설에 따르면 창힐이 한자를 만들어내자, 하늘에서는 곡식이 떨어지고, 귀신이 울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문자라는 것은 단순히 소리나 의미를 대신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자의 기원이라 여겨지는 갑골문자는 동물의 뼈를 태울 때 만들어지는 점괘로 사용되었다. 한약방의 약재로 팔리던 용골에 쓰인 어느 갑골문에는 신에게 운명을 묻는 이런 질문들이 가득하다.
‘비가 올 것인가? 아마 비가 오리라, 그 저녁 정말로....., 오늘 저녁 비가 올 것인가? 코끼리를 포획할 것인가?’(1)
고대의 문자는 사람들끼리의 소통이 아닌, 신과의 소통을 위해 사용됐다. 문자가 신화의 세계에 속했다는 것은 이집트 문자 히에로글리프를 살펴봐도 확인된다. 히에로글리프에 대한 글을 읽다 보면 이상한 내용을 하나 만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기원전 305년 ~ 기원전 30년)의 사제가 3000년이 된 문서를 해독했다는 이야기이다. 기원전 30년이라는 시간도 까마득한데, 그 아득한 시간에서부터 3000년 전에 쓰인 문서를 읽어냈다니.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히에로글로프라는 문자가 3000년 동안이나 변함이 없는 문자였다는 뜻이다. 천 년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변치 않는 문자. 이는 히에로글로프가 신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었기에 가능했다. 이 문자로 쓰인 말씀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망자들을 신들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 쓰였다. 이를테면 문자는 인간들을 신들의 세계, 우주의 원리와 연결된 통로였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통로를 복원시키려 하고 있다. 어쩌면 소년은 여자아이의 이름이 담긴 글자를 일종의 점괘로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그 애가 나에게 눈길을 줄 것인가?’ ‘그 애는 다시 나에게 웃어줄 것인가?’
공책 위에 쓰는 두 글자는 소년을 다른 세계로 데리고 간다. 그 세계에는 지난 겨울 소년이 갔던 북경반점이 있고, 여자아이와 함께 합창을 하던 공연장 무대가 있다. 합창을 하러 간 아이들은 흰색 목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여자아이는 소년이 서 있는 자리를 기준으로 왼쪽으로 세 번, 거기에서 앞쪽으로 두 번 간 곳에 서 있다. 소년은 흘깃흘깃 여자아이의 옆모습을 보며 노래한다. 공연장에서 돌아오는 길, 소년은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할 무엇인가를 하기로 한다. 그러다 길바닥에 달라붙은 껌딱지를 본다. 그 모양이 깨진 거북이 등껍질 같다. 소년은 그 껌딱지를 기억에 세기기로 한다. 중년이 된 소년은 지금도 그 모양을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종종 궁금해한다. 그 거북등 모양의 껌딱지는 어떤 점괘를 가리켰던 것일까?
여전히 사방은 조용하다. 한 줄, 두 줄. 여자아이의 이름이 점점 빈 종이를 채워 나간다. 소년은 다시 고개를 슬쩍 들어 집안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더듬더듬 여자아이의 이름을 소리 내 본다.
첫 번째 글자. 폐에서 흘러나온 공기가 후두를 거쳐 성문을 지난다. 혓바닥이 입천장의 연한 부분을 막았다가 터드린다. 혀는 입안 중간에서 약간 뒤로 갔다가 이내 다시 입천장의 연한 부분 근처로 돌아온다.
두 번째 글자. 혀가 윗잇몸 근처로 다가가자 공기가 흐르며 마찰을 일으킨다. 이윽고 입술이 둥글게 말리고 혀는 높은 상태를 유지하며 뒤로 물러갔다가, 다시 잇몸 근처를 막았다 열며 공기를 코로 흐르게 한다.
소년은 그전까지 단 한 번도 여자아이의 이름을 직접 불러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그 애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야!’라고 불러봤을 뿐이다. 어쩌다 다른 애들 입에서 그 애의 이름이 나오면 소년은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그 이름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소년은 그렇게 좋았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여자아이의 이름을 소리 내 본다. 소년은 어색함에 멈칫거리면서도 몇 번이고 천천히 그 이름을 불러본다. 공기가 자신의 몸을 통과해 만들어낸 소리를 소년은 듣는다. 마법이 작동한다. 적어도 공기의 진동이 지속되는 그 시간에는 여자아이가 소년과 함께하는 것 같다.
훗날 소년은 언어학 수업에서 어떤 소리와 대상이 필연적으로 묶이는 관계란 없다고 배울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되어 이를 다시 자신의 학생들에게 강조하며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느낀다. 다른 친구들이 촌스럽다고 놀리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 속에는 그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가리키는 소리는 바로 그 두 글자가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소년은 그 이름이 가진 소리가 달고, 간지럽고, 그리고 또, 어지럽다. 마법의 부작용 같아 소년은 이내 입을 다문다. 그리고 다시 이름을 써 내려간다.
현관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소년은 황급히 이름이 쓰인 공책 한 페이지를 북하고 찢어 낸다.
(1)시라카와 시즈카(2017), <한자 – 기원과 그 배경>, 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