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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Mar 11. 2022

[실내의 백가지] ep13. 랜선 모임

100 things i've never done

반복된 일상에 뻣뻣해진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자, 해보지 않았던 백 가지를 행동해보며 남기는 일상 기행문. 어쩌면 실내가 아니어도 좋다. 비루해도 좋고, 지루해도 좋다. 새로운 것, 혹은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이든 환영하는 경험주의 일기장.


벌써 코시국의 세 번째 겨울이 완전히 끝났다. 습관처럼 롱 패딩을 입고 외출한 지 삼십 분 만에 양쪽 겨드랑이가 찝찝해진 걸 보니 입춘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불현듯 '올해도 다를 바 없으려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를 맞은 후 두 번째 겨울을 돌아본다. 그 해 12월 31일, 나는 시끌벅적한 곳을 피해 캠핑을 떠나 있던 고운이와 집에서 혼술 중이던 소은이, 그리고 가족들과 단란한 밤을 보내는 중이던 림이와 소소한 온라인 망년회 겸 신년회를 가졌다. 각자의 자리는 고요했으나 화면 속 망년회 모임은 여느 때의 겨울처럼 시끌시끌했다. 서로의 목소리가 겹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던 와중, 우리는 내년 겨울만큼은 다를 거라며 확신했던 기억이 난다.



-야야 내년엔 진짜 제주도다

-제주는 무슨 내년에는 해외로 가야지

-헐 맞네

-내년엔 줌(zoom) 말고 공항에서 보자



요즘 확진자 추세를 보니 내년 이맘때면 마스크도 없겠다며, 그때는 꼭 진짜 모여서 해 뜰 때까지 마셔보자며 화면 속 우리는 각자의 술잔을 들었다. 하지만 1년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마스크와 가장 친했고, 직접 모이지 못했으며, 확진자 수 역시 멎기는커녕 대폭발을 했고, 여전히 각자의 집에서 영상통화로 만나야 했다. 







거리두기마저도 멈춘 2022년. 역병 3년 차를 맞으니 많은 것이 무뎌진다. 별안간 화면 속 친구의 똑같은 얼굴을 보다 보니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얜 어떻게 삼십 대가 됐는데도 고등학교 때랑 똑같지? 아마 친구 역시 화면 속 코파는 나의 모습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아무렴 어떤가. 역병이 있거나, 없거나 장소를 막론하고 어떤 방향으로든 모여서 떠들고 있는 이 친구들만큼은 참 여전하다는 것. 그 자체가 문득 각별해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이후 나의 랜선 모임은 친구와 가족을 넘어 업무적으로도 사용될 일이 많아졌다. 점점 잦아지는 빈도와 더불어 이용 방법도 제법 다채로워졌다. 괜히 우쿨렐레나 하모니카를 들고 와서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던 연주도 선사하고, 블루투스 마이크를 가지고 와서 엄빠가 좋아하는 트로트인 '진성-보릿고개'를 완창 하기도 한다. 엉성한 랜선 무대가 끝날 때까지 (강제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가족들은 무대가 끝난 후 보란이의 뿌듯한 인사가 이어지면 소울 없는 환호성을 질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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