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things i've never done
팬데믹으로 잔뜩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자, 해보지 않았던 백 가지의 일을 행동해보며 남기는 일상 기행문.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다면 실내가 아니어도 좋다. 비루해도 좋고, 지루해도 좋다. 새로운 것, 혹은 잊고 있었던 그 어떤 것이든 환영하는 경험주의 일기장.
<실내의 백가지> 연재를 통해 실내에서 내가 느끼고 행할만한 백가지를 떠올렸을 때, 단 한 번도 '확진'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자신만만했던 건지, 어쩌면 그만큼 막연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오미크론은 서울에 비해 평온했던 지방 곳곳을 들쑤셨다. 마스크를 끼든 말든 급속도로 퍼져나간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을 가진 오미크론이라지만, 그럼에도 내 기관지까지 바이러스가 쏙 하고 들어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하지만 나는 2022년 2월의 마지막 날, 코로나 확진을 판정받았다.
다른 확진자들도 대부분 그러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첫 번째로 느낀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의 외출도 하지 않았다면 모르겠는데, 2년이라는 세월 앞에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친구 결혼식에서 뷔페까지 먹고 온 사람이 느낄법한 감정치고는 조금 의아하다. 그럼에도 나는 명백하게도 억울함을 가장 먼저 느꼈다. 그 감정 기저에는 내 주변에 나보다 외출을 최소 3-4배는 많이 하는 친구들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왜 내가 xx이보다 먼저 코로나에 걸려야 하지! 나는 억울해했다.
두 번째 감정은 '피로함'이었다. 신체적으로 피로함을 느낀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피곤함을 느꼈다. 결혼식장에서 정말 오랜만에 만났던 친구들에게 일일이 비소식을 전해야 했으니까. 그 친구들 중에는 세 살배기 아이 아빠도 있었고, 다음 달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도 있었고, 큰 시험을 앞둔 공시생 친구도 있었다. 이런 생각과 함께 억울함은 이내 죄책감으로 치환되어갔다.
음성이 선사한 오만함
다중이용시설을 방문하기 전에 미리 자가 키트로 검사를 해보는 행위는 매우 올바르고, 기민하고, 조심성 있는 행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음성 결과를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오만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가 키트의 부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나는 평소에 친구들과 빨대를 공유하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와 들고 있던 텀블러 속 커피를 마셔버린 유주를 나는 막지 않았다. 평소라면 빨대 말고 텀블러 뚜껑을 열어 다른 입구로 마시라고 말했을 것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뷔페 식사 자리에서 일성이가 내가 한 점 먹고 남겨둔 스테이크 접시를 가져가기도 했다. 평소였다면 내 젓가락이 스테이크에 조금이라도 닿았을 테니, 그냥 새 접시에 고기를 받아오라고 말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날 내내 나의 머릿속 한편에는 '나는 음성이지롱'과 비슷한.. 그 어떤 은은한 당당함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결혼식 전날 키트를 써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혼식장에서 조금 더 조심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방역 수칙 완화로 딱히 인원 수나 거리두기에 상관 없이 자유로운 뷔페 이용이 가능하지만, 어쩌면 나만큼은 이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몸보다 마음이 무겁다
약 한 달 전쯤, 부산에 사는 친구 김고니가 먼저 코로나에 걸렸었다. 고니는 후각이 둔해진 점 외에는 딱히 아픈 증상이 없었음에도 몇 날 며칠을 내리 울었다고 말했었는데, 그 이야기가 뒤늦게 다시 떠올랐다. 고니 역시 본인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스트레스보다는 본인 때문에 연주회가 취소되고, 동료 중 임산부들이 감염의 두려움을 느껴야 했고, 가족들까지 갑작스러운 격리에 들어갔으니 괜한 죄책감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거다. 고니처럼 나 역시 탓할 곳 없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고, 그 이틀간은 몸보다 마음이 아주 무거웠다. 하루쯤 지나자 심지어 몸도 같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약 기운 탓이 아님에도 이틀을 내리 잠만 잤던 기억이 난다. 1차, 2차 백신을 맞았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나는 수면을 통해 회복하는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항체를 만들어야 해서 겁나 바쁘단다. 그러니 너는 괜히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잠이나 자렴.' 하고 몸이 나를 억지로 재우는 것만 같았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잠에 빠져든 이틀 동안, 무거웠던 몸은 다시 가벼워지고 묵직하게 따끔거리던 목도 가라앉았다. 다른 확진자들의 증상에 비해 비교적 가벼이 지나간 느낌이다.
전조증상
생각해보면 전조증상이 없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미약한 두통이 두 번 정도 찾아왔었고, 종종 시야가 흐려지기도 했다. 나에게는 약간의 난시가 있는데, 그때의 흐림은 평소의 난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문득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오미크론의 여러 증상 중에는 '시야 흐림'과 '두통'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목이 2-3일 정도 칼칼했다. 걱정이 앞섰던 나는 결혼식 3일 전과 하루 전에 총 두 번의 항원검사를 받았고 두 검사 모두 음성이 나왔다. 결혼식 전 이틀 동안 내가 사는 지역은 유독 미세먼지가 좋지 않았는데, 음성 결과를 확인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내 모든 증상이 '미세먼지' 때문이었구나.. 싶었고, 동시에 안도했다. 그리고는 자신 만만하게 결혼식장에 참석한 것이다.
하루만 더 일찍 잠복기가 끝났더라면, 나는 결혼식에 가지 않았을 거고..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칠 일도 없었을 거고.. 주위에 끼친 민폐보다 나 자신의 몸 상태를 더 넉넉히 살폈을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쳐버릴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하루에서 이틀 정도 스트레스를 받게 된 것이다. 의아한 점은 그 후의 상황인데, 평균 잠복기를 고려하여 확진 소식 이후 약 3일에서 5일 정도 결혼식에 함께했던 친구들의 상태를 체크했지만 신기하게도 모두 음성이었다. 희한한 일이다. 백신의 힘인가? 중증도는 낮지만 감염력은 대박이라더니.. 알다가도 모를 뻐킹 오미크론이다.
하지만 모두 지난 일이었다. 어쨌거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내 몸 곳곳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코로나발 세 번째 격리생활이 시작되었다. 내 생애 코로나 확진은 처음이었어도, 자가 격리는 어느새 세 번 째라니.. 처음이 아닌 만큼, 좀 더 재미있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슬기로운 격리생활
정환이와 함께 확진인 것은 불행 중 (큰) 다행이었다. 이 와중에 심지어 우리 둘 중 한 사람만 음성이었다면, 집 안에서도 또 한 번 격리를 해야 했을 테니 그 얼마나 협소하고, 지루하고, 답답하고, 괴로웠을까. 동반 격리가 처음이 아닌 만큼, 우리는 몸 컨디션이 돌아오는 대로 이 격리 생활을 휴가처럼 생각해보자며 위로했다. 생각보다 증상이 무난하게 지나가면서, 평소 일을 핑계로 집에서 건드리지 않았던 것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먼지가 폭폭 쌓인 오븐을 열어 비루한 베이킹에 도전해보고, 근래 다니는 중인 댄스학원 수업 영상을 틀어둔 채 둘이서 격렬한 춤 연습도 하고, 블루투스 마이크를 연결해 노래도 부르고, 스케치북에 삐뚤빼뚤 그림도 그렸다.
꽤 다채로운 일상을 보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재밌었던 건 단연 '먹거리 구매'와 '먹거리 먹기' 활동이었다. 냉동제품부터 신선제품까지, 배달이 안 되는 게 없는 대한민국이지만 평소에는 '직접 사 오면 되는 걸 왜 굳이 배달비까지 주고 시켜?'라고 생각했던 품목들이 있었는데 바로 과자, 아이스크림, 라면, 커피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집 앞 편의점에만 가도 살 수 있는 품목들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격리중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왕 사이즈 아이스크림부터 벤티 사이즈 프라페, 매콤 달콤한 비빔면, 우유, 채소, 그리고 대패 삼겹살까지 모조리 문 앞에 배송시켰다. 정말 격리하기 편리한 세상이다.
그렇게 확진자의 일주일 및 격리 해제를 하루 앞둔 오늘 이 글을 써본다. 일도 멈춘 채 신나게 먹고, 자고, 놀면서 지내다 보니 시간이 훅 지나갔다. 증상이 많이 심했다면 시간이 이렇게 훌렁 지나가지는 않았을 거다. 미어터지는 대한민국의 코로나 확진 소식에 대다수가 거의 반 포기의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얼마 전 실시된 국민인식 조사에서 응답자 중 60%가 '이제 코로나는 통제 불가능한 상태라 판단'했다고 답변했다. 이 조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 역시 그렇다. 참고로 오미크론은 본인 감염 이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기 전까지 걸리는 시간을 의미하는 '세대기'가 불과 2일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본인에게 그 어떤 증상이 찾아오기도 전에 주변부터 감염시키기 너무나도 쉬운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올해 1월에는 델타와 오미크론이 섞였다는 '델타크론'이라는 놈..이 아니고 변이까지 탄생했다. 중증도가 높은 델타 변이와 전파력이 높은 오미크론이 만났으니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겁도 나지만, 다행히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중증도와 감염력 모두 가볍게 예상하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글로벌 왓더뻑이자 왔더헬인 코로나 바이러스.. 아무래도 증세보다는 감염성이 센 녀석으로 겪어서 그런지, 이제 무섭기보다는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하다. 완벽한 치료제가 나타나 상용화되든, 변이의 무한 증식이 말끔히 멎어서 종식이 오든, 어떤 결말이든 빨리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