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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boran Oct 07. 2022

[실내의 백가지] ep.16 Rummikub

얕은 행복이 주는 깊은 불행

무거운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 화면을 숙제처럼 바라본다. 상대의 패가 조금만 더디게 나와도 한없이 눈이 감긴다. 잠들면 안 된다... 그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피곤해도 성의가 없어선 안된다. 잔뜩 인상을 찌푸려서라도 집중을 멈춰 선 안된다. 이기는 패를 가지고도 어영부영하다 어이없게 지는 것만큼 내 잠을 달아나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 이 시간에는 해도 되는 것보다 하면 안 되는 것이 훨씬 많다. 이걸 과연 나는 여가활동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은 매일 밤 내가 누워서 루미큐브를 할 때의 상황이다. 루미큐브라는 주어만 쏙 빼고 보면 거의 전장의 선두에 서있는 용사만큼이나 기백이 대단하다. 잠이 아무리 와도, 아무리 늦게 누웠어도 꼭 끝마쳐야 할 하루의 마지막 일과처럼 나는 루미큐브를 수행한다. 말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수행 중이다. 한심한 객반위주의 현장이다.


한 날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로 수상한 일이 있었다. 두 판, 세 판, 열판을 넘어 수십 판을 연승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 운 좋은 승기가 끝나면 나도 기분 좋게 루미큐브를 나가야지'라고 다짐한 탓에 나는 잠들지 못하던 중이었다. 도저히 지지를 않으니 잠이 와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져야 잘 수 있는데, 그렇다고 지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만든 비루한 규칙에 나는 처참하게 날을 새고 있었다. 야심한 밤에 내 시력은 동태 눈깔이 되어간다.


물론 이건 루미큐브만의 탓은 아니다. 이런 암흑기(?)가 처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암흑 속에서 온라인 속의 사람들과 게임을 하느라 몇 시간을 허비하는 시즌은 해마다 한 번씩은 있었다. 1년 전엔 피망 뉴맞고가, 3년 전쯤엔 모두의 마블이 그랬다. 시간이 갈수록 이 짤막하고도 긴 루틴이 '하루의 낙'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지우기가 어려운데, 이 생각이 결국 내 수면의 질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얕은 행복이 주는 깊은 불행이다. 아무런 것에나 아무렇게나 중독되는 사람은 오락도 오락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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