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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Apr 12. 2024

쓰고 싶은데 쓰고 싶지 않아

얼마나 되었나 찾아보니 벌써 한 달 여가 흘렀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스>를 본 날로부터. 메가박스 앱에 들어가 보니 정확히 3월 9일로 기록돼 있다. 여전히 오스카 시즌 즈음이면 챙겨보고 싶은 영화들이 쌓이기 마련이라 자주 영화관을 찾곤 했다. 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좋은 작품들이 많았던 덕에 2-3월의 영화관 나들이는 매번 꽤 만족스러웠는데, 그중 하나가 <패스트 라이브스>였다. 훌륭한 영화는 보고 나서 누군가와 떠들고 싶어지고,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유독 <패스트 라이브스>가 그랬다. 머리와 마음을 왔다 갔다 하며 샘솟는 단어들이 있었고 감정들이 있었다. 좋은 것이 왜 좋은지 생각하고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 더 이 좋은 것이 나만의 좋은 것이 될 수 있을 것만 같고, 이 영화의 아주 일부나마 내 것이 될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거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내내 영화를 생각했다. 장면을 되새김질하고 금세 잊혀질까 대사를 다시 검색해봤다. 그러면서 아, 이번엔 진짜 글을 쓸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또 쓰지 못했다.


이번엔 진짜 써보자 결심을 하고 간만에 노트북을 켜고 앉았는데, 앉아서 뭘 했냐면. 우습게도 파이썬 코드를 짰다. 그거 있잖은가, 프로그래밍 언어. 최근에 생성형 AI에 관심이 생겨서 그다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파이썬을 한 번씩 써보고 있던 참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이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온 주말 저녁에, 복잡다단한 감정을 글로 남겨 보겠다고 다짐하고 켠 노트북으로 나는, chatGPT와 대화하며 파이썬 코드를 만들다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자못 심각해졌다. 뭐야 대체. 진짜 이제 나는 글을 못쓰게 된거야? 심지어 파이썬 코딩을 하는 게 글을 쓰는 것보다 편했던 건가?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했다. 감상들이 흘러가 버리기 전에 진짜로 글을 써보자. 너무 무겁게 시작하려 하면 또 못하게 될테니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으로 짧막하게 나마 뭔가 적어보자. 떠오르는 단어, 대사, 감정. 내가 남기고 싶었던 게 대체 무엇이었는지 손 끝으로 던져 나가다 보면 어슴푸레 보이게 되겠지. 그렇게 몇 개의 문구를 카톡채팅창에 올려 놓았다. 이제 한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정말로 글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결국 나는 또 글을 쓰지 못했다. 글을 시작하려니 글의 구조를 잡아야 하는데, 그게 너무 힘든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귀찮고 무서웠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전개할 지, 그리고 어떻게 끝맺음할 지 고민을 하는 것이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고민을 애시당초 시작하기가 싫었고, 그 지난한 고민의 시간을 뚫고 지나가야만 하나의 글이 나온다는 사실이 무서졌다.


그래서 내가 뭘 했냐면 말이다, 이건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 어디에도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chatGPT에게 내 감정의 단초들을 몇 가지 던져 주고는 글을 써달라고 했다. 처음엔 이런 글을 쓰고 싶으니 글의 구조를 잡아달라고 했다가, 나중엔 아예 내가 원하는 문체와 뉘앙스를 알려주고 예시적으로 글을 작성해달라고 했다. GPT는 순식간에 글을 완성시켰다. 수정해달라고 하는대로 새로운 버전의 감상문도 여러 편 쏟아내 주었다.


신기했다. '나'같진 않았지만 충분히 괜찮은 글들이었고, 조금 '나'답게 손을 댄다면 그다지 고민하지 않아도 글 한 편을 적당히 마무리 수 있을 것 같았다. GPT를 켜놓고 이 부분만 좀 수정해줘, 이런 느낌이 좀 더 살았으면 좋겠어를 몇번씩 꽤나 열중하여 주고 받았다.


그리고 현타가 찾아왔다.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거였나.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이란 게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 내는 거였나. GPT는 잘못이 없고 충실한 나의 도우미가 되어주었지만, 순식간에 나는 슬퍼졌다. 그래서 그날도 글을 또 한번 포기했다.


왜 글을 쓰고 싶었을까. 글로 써내려가는 과정에서 마음을 진지하게 응시하고 이유를 묻고 그 나름의 내적 논리를 만들어 가면서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더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글을 쓸 수 없었을까. 그 이해의 과정 속에서 내 안에 아주 많은 생각들이 깨어지고 부딪히며 갈고 닦여야 하기 때문이다. 고뇌와 고난의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이, 약간은 한심하고 조금은 후련했다.


결국 나는 <패스트 라이브스>에 대한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패스트 라이브스>에 대한 글쓰기를 포기한 글 지금 이렇게 쓰게 되었. 뭐 일단은 그것으로  아닌가. 덕분에 글 못 쓰는 병을 고쳤으니, 이 정도면 지금 내게는 분히 보람있는 셈이다.



+덧. 글은 쓰지 못했지만 그림 하나는 그렸다. 그게 어떤 것이든, 무엇가를 남기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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