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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 May 25. 2024

취향의 역사(2)

천계영의 <오디션>과 고독한 천재의 매력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진입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으니, 언니가 있는 친구들은 뭔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내가 모르는 의류 메이커를 알고 있었고, 내가 모르는 만화를 봤으며, 내가 접해 보지 못한 음악을 들었다. 오빠와 함께 커 온 나는 알지 못한 세계였다. 내게는 미지인 세계를 한 발 앞서 경험한 그들은 성숙하고 세련돼 보였다. 부러웠고 멋있었다. 나도 세련된 취향을 가진 멋진 여자가 되 싶었다.


그맘때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하얗고 조용하고 성숙한 아이였다. 글씨를 끝내주게 잘 썼고 말투가 조곤조곤했다. 그녀는 성당을 다니는 친구여서 세례명이란 게 있었는데, 무교였던 나는 그마저도 신비로워 보서 몇 번 성당을 쫓아가 보기도 했다.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고 빵조각을 집어먹는 낯선 세계 속에서 그녀는 어색함이 없었, 삐그덕 대며 그를 따라하던 나는 일종의 경외심같은 걸 느꼈다. 와, 어른이다!


나에게 소녀취향의 만화잡지를 알려준 사람 그녀였다. 알게 된 이후엔 매월 용돈을 모아 잡지를 샀다. 여러 만화를 한번에 읽다 보면 유독 마음에 드는 작품이 생기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주로 시크하고 비밀스러운 매력이 있는 여주인공 캐릭터에 끌렸다.



그녀가 빌려줬던 천계영 작가의 만화책 <오디션>은 뭐랄까-, 완전히 또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 만화는 지금껏 내가 봐온 그 어떤 만화(그래봤자 뭐 얼마나 되었겠냐만)와도 달랐다. 캐릭터가 달랐고, 개그감각이 달랐고, 모든 대사가 예상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젠더를 이용하는 방식이 완전히 로웠다.


우선 은성, 도나, 우수, 이든 등 소위 순정만화식 작명법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부옥', '명자','달봉' 따위의 이름부터가 충격이었다. 만화 속 이름이란 곧 캐릭터의 이미지와도 직결되는 것이라 혼스러웠다. 이렇게 예쁘고 멋진 여자의 이름이 명자...? 이렇게 잘생기고 몸좋은 캐릭터 이름이 달봉...? 주인공 이름이 이 정도로 촌스러워도 되는거야?


반전이었던 건 만화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그 이름만큼 찰떡인 이름이 또 없는 것이다. 명자는 명자여야 하고, 달봉은 반드시 달봉이어야만 그 캐릭터가 가진 특성과 분위기를 온전히 담을 수 있었다. <슬램덩크> 주인공들의 한국 이름 작명만큼이나 천계영 작가의 신들린 작명이었다고 지금도 감탄하게 된다.


<오디션>의 주인공 재활용 밴드 멤버들. 좌측부터 장달봉(베이스), 황보래용(보컬), 류미끼(드럼), 국철(기타).


이름은 시작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부옥'은 추진력있고 카리스마있는 행동대장으로,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여성 탐정 캐릭터였다. 다소 궁상맞고 촐싹대는 구석이 있다는 점이 부옥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특징이었는데, 이 역시 여성 캐릭터에게 흔히 부여되지 않는 특성 중 하나였다.


'류미끼'는 반대로 대중매체의 주요한 남성 캐릭터에게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특성을 역으로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류미끼는 끝장나게 예쁜 남자였고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최대한으로 즐기는 애티튜드까지 지닌 캐릭터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티모시 샬라메 이전에 류미끼가 있었다-고 까지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류미끼는 유독 장달봉과 합이 잘 맞았는데, 장달봉이 예쁜 것에 약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장달봉의 '예쁜 것 사랑'은 성별을 뛰어넘어 평등했다.


이처럼 <오디션>은 여성스러운 여성 캐릭터, 남자다운 남성 캐릭터의 공식에 익숙했던 10대 소녀의 인식 체계에 돌을 던지고 금이 가게 만든 작품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돌팔매질이 기꺼웠다. 여자가 멋있고 남자가 예쁜 세계가 있는데, 그게 심지어 재밌기까지 하잖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예쁜 여자보다는 멋진 여자가 되고 싶었던 소녀였으니까.


<오디션>이 내게 열어준 세계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상형에 대한 인생 첫 자각이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상형'보다는 '이상향'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이상형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여기서는 이상형이라 일컫겠다.



그의 이름은 '국철'이었다. 은하철도999 시대도 아닌데 '철'이라니 역시나 오디션식 작명법다웠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이 촌스러운 이름마저도 으로 느꼈다. 아니, '국철'이 '국철'인데 이름이 다 무슨 상관이냐 싶었다. 이 남자는 그제껏 내가 마주쳐온 (2D와 3D를 포함한) 그 어떤 캐릭터보다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다.


국철의 매력은 첫째는 천재성, 둘째는 비밀스러움, 셋째는 외모외모외모 였다. 국철은 어두운 과거와 비밀을 지닌 인물이었고, 말수가 적고 시니컬했다.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이지만 덥수룩한 머리로 가리고 다녔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누구보다 뜨겁게 끓어오르는 열정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했다. 그는 종이 건반을 두드리며 스스로 음악을 익혔고 지성과 센스를 타고난 연주자였다. 물론 이 모든 캐릭터성의 완성은 비주얼이었다. 국철은 아름다운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 쭉뻗은 다리를 지녔고, 무엇보다 섬섬옥수 길다란 손가락으로 기타를 튕기는 남자였다. 이 남자는 그야말로 당시의 내가 가장 소망하던 외적 특성을 모두 가지고 탄생한 인물이었다. (나는 특히 나의 작고 동글동글한 손을 미워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국철은 중2병 환상체의 완성형같은 것이었다. '고독하고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타고난 천재'. <오디션> 속 소녀들처럼 국철에게 반하는 것은 내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국철은 코 앞에서 너무 잘생겼다고 꺅꺅대며 감탄하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에 숨어서 오빠의 기다란 기럭지와 서릿발 같은 냉랭함을 음미하고 싶게 만드는 남자였다. 아,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진짜 위험한 남자였네.


그를 통해 나는 인생 최초로 "오빠, 사랑해요"를 말하고 싶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멋있는 이성에 대한 첫 자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로부터 쭈-욱 이어진 나의 '사회성 결여 천재형 캐릭터'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 지점이기도 했다.


덧1) 셜록, 하우스, 쉘든, 서태웅, 아이언맨... 그러고 보니 여캐가 별로 없네. 여캐 추천 받습니다.


덧2) 아, 참고로 현재의 이성 취향은 장달봉에 가깝다. 역시 국철은 이상형보다는 이상향이었달까. 그때의 나는 국철처럼 뭔가 (비밀, 숨겨진 능력, 우아함 등등이) 있어 보이고, 멋져 보이길 바랐던 것 같다.


지금은 훌쩍 커버려서 조금 아쉬운 시트콤 <Young Sheldon>의 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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