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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용 Dec 04. 2023

머뭇거리고 쉬어가는 붓질이 동일률 너머 형상을 찾다

화가 박덕실

그림에서 하늘을 담은 호수를 그리면, 하늘과 호수 안의 하늘이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유사할 수밖에 없다. 수면은 동일률을 확정하는 등호의 기능을 한다. 호수의 표면이 드러내는 것은 다른 듯 같은(같은 듯 다른 것과는 당연히 다르다), 동일률 지평의 개척이다. 이미지의 중첩이자 대조를 통해 인간의 세계 인식을 확장한다. 본래 하늘은 하늘이고, 호소(湖沼)는 호소였다. 인간의 시야를 통해 두 이미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만들어 낸다.

햘슈타트의 인상, 72.7x60.6, Oil on canvas, 2019



박덕실 화가의 <햘슈타트의 인상>에서 기존 전통적 회화의 동일률이 도전받는다. 화폭 가운데 있는 호수가 어릿어릿 무언가를 담아내는데 그것이 하늘은 아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호숫가의 건물이 투영돼 수면에 어릿하게 드리운다. 이때 호수를 통해 동일률이 확장됐는지는 의문이다. 왼편의 건물들은 호숫가에 자리한 듯한 느낌을 주지만, 오른쪽 건물들은 호수에 떠 있는 배처럼 느껴진다. 원래 호반을 따라 연이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건물들이지만 아예 다른 데서 빌려온 사상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오른쪽 건물군은 어색하다. 그렇다고 왼쪽 건물군과 오른쪽 건물군이 어울리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비유를 들면 평면거울과 곡면거울을 붙여놓은 듯하다. 수면에 어린 게 동일률의 세계인지는, 그런 듯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하늘이 문제다. 호수에 비친 하늘에 그림 속 실제 하늘이 어긋난다. 모상이 실제보다 더 실제적이다.


하늘이 노란색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풍경화라고 할 수는 없다. 햘슈타트 호수의 풍경은 사람이 사는 건물과 건물 뒤편 산을 경계로 물과 하늘이 비슷한 색감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늘은 호수 아래 모차르트 생가의 색깔과 맞닿았다. 수면이 아니라 수면 아래가 하늘과 호응함으로써 기존 동일률이 무력해지고 동시에 확장되어 되살아난다. 따라서 이 그림은, 동일률을 검증하는 감각기관을 활용하여 인간의 세계인식을 확장한다기보다 동일률 자체를 확장한다.


와일드 가든의 이른 아침, 91x116.8, Oil on canvas, 2023



<와일드 가든의 이른 아침>은 정갈한 그림이다. <햘슈타트의 인상>처럼 얼핏 편안한 풍경화처럼 보인다. 화가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더 스테이 힐링파크 와일드가든’에 다녀온 가족여행의 기억을 화폭에 담았다. 블루엔젤나무를 기본으로, 수국, 원추천인국, 억새풀 등 그곳에 자생하는 다양한 식물을 인간의 공간인 교회와 펜션과 함께 버무려 담아냈다. 그림에서 교회와 펜션은 숲에 녹아 들어가 나무로 변해버린 듯하다.


안정적인 구도에 대상물이 조화롭게 어울린 화폭에서 원근법은 은근히 작동하면서 슬그머니 배제된다. 전체적으로 입체주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공간의 분방한 해석이 없지만, 세부적으로는 곳곳에서 작가의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마음의 크기나 인상의 강도로 화폭을 구성하되, 안정과 조화를 벗어나지 않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눈 속에 핀 튤립, 162.2x130.3, Oil on canvas, 2018


<눈 속에 핀 튤립>에서도 작가의 이런 기조가 유지된다. 제주도 가족여행에서 조우한 폭설의 흔적이 그림에 별로 없다. 언뜻언뜻 소나무 잎과 눈이 섞여 있지만 가지 위엔 강설 흔적이 전무하다. 앞에 튤립들이 만개하면서 계절은 더 모호해진다. 당연히 실제 풍경이 아니고, 튤립이 핀 모습을 상상하여 넣었다.


맨 앞의 나무는 십자가 모양으로 작가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 나무만 껍질을 세밀하게 표현하여 고통받은 신의 아들의 흔적을 형상화했다. 종교개혁가 장 칼뱅의 5대 교리를 첫 글자만 따서 ‘TULIP’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그림은 종교화가 된다. 교회에 걸어도 카페에 걸어도 각각 자기 목소리를 내는 그림이다.


하늘은 <햘슈타트의 인상>과 마찬가지로 노란색이다. 모종의 불안과 동요를 표현했다고 상상할 수 있지만, 박 화가가 하늘의 색깔로 이 색감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다만 <눈 속에 핀 튤립>에서는 이 빛깔의 하늘이 그림의 중심을 잘 잡아 준다. 노란 하늘을 배경으로 튤립 꽃밭에 우뚝 선 소나무 십자가.


바람 부는 제주바다, 116.8x91, Oil on canvas, 2019
가평잣향기 푸른숲의 자유, 116.8x91, Oil on canvas, 2021



박 화가의 그림은 유화이지만, 수채화 같기도 하다. 붓의 터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감을 다루는 방식에서 유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유화에 쓰는 테레빈유를 안 쓰고 린시드유나 뽀삐유 등을 쓴다. 그것도 아주 적게 쓴다. 서울대 서양화과 재학 때부터 약 40년째 바뀌지 않은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서, 반짝임이 적고 어쩐지 세련되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투박하고 소박하며 혹은 거칠다는 인상까지 받을 수 있다. 유화 특유의 부드럽게 밀려 나가는 질감 대신 머뭇거리는, 주저하는, 한 번 더 생각하는 붓터치가 나오게 된 배경이다. 꼭 기름만이 이유가 아니라, 박 화가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그런 그림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능한 한 세상을 충실히 반영하되 기성 문법과 작화 관행을 에둘러 가는 느린 화풍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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