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노라>
영화 <아노라>에 대해 버라이어티지는 “낭만적이고 반항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평가했다. 만일 이 영화가 신데렐라 스토리라면 왜 낭만적이고 반항적일까. 버라이어티의 평가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애초에 낭만적이지 않다는 전제가 들어있다고 봐야 한다. 낭만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신데렐라 스토리가 낭만적인지 아닌지가 달라질 것이기에 이 논의는 그만하자. 다만 신데렐라 스토리를 낭만적이지 않다는 버라이어티의 관점이 건강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반항적’이라는 평가는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를 무색하게 만드는 게 <아노라>를 신데렐라 스토리로 보아야 하는지가 애매하다.
신데렐라?
영화의 줄거리만으론 버라이어티의 평가가 맞아들어가는 듯하다. 뉴욕의 스트리퍼 아노라(미키 매디슨)는 자신이 일하는 바에서 만난 철부지 러시아 재벌2세 이반(마크 아이델슈테인)과 벼락같은 사랑에 빠져 충동적으로 라스베이거스에 가 결혼한다.
그러나 이 결혼은 신데렐라 스토리와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신데렐라 스토리에서는 결혼이 결말이지만, <아노라>에선 결혼이 시작이다. 충동적 결혼을 해소하는 과정이 영화의 얼개다.
이후 줄거리는 ‘1 대 1’에서 ‘1 대 다’로 바뀐다. 러시아에 있는 이반의 부모가 아들의 결혼을 전해 듣고 미국에 있는 수하 3인방에게 결혼을 무효로 하고 둘을 갈라놓으라고 지시한다. 이들이 들이닥치자 부모를 두려워하는 이반은 무책임하게 도망치고, 아노라와 3인방이 철부지 이반을 찾아 헤맨다. 결혼을 지키려는 아노라와 어떻게든 결혼을 무효화해야 하는 3인방의 기이한 동행에 미국으로 서둘러 날라온 이반의 부모가 가세하며 환장할 추격전이 빚어진다.
션 베이커가 연출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아노라이다. 겉보기로도 아노라는 신데렐라가 아니다. 무엇보다 결말이 왕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아니다.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 혹은 이혼과정에서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했지만, 아노라는 생각보다 순순히 ‘신데렐라’ 자리에서 내려온다. 베이커 감독이 초점을 맞춘 건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유사 신데렐라 스토리를 통한 아노라의 자아 탐색과 진정한 사랑의 발견이다. 부엌데기나 다름없는 처지에 신데렐라의 기회가 주어지자 기민하게 그 기회를 거머쥐고, 거머쥔 다음엔 악착까지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손에 꽉 쥔 것을 확 놓아버리는 일종의 실존적 여정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를 설명하며 ‘즉자 존재[être-en-soi]’와 ‘대자 존재[être-pour-soi]’를 구분한다. ‘즉자 존재’는 자기 안[en]에 빠져있는 상태이고 ‘대자 존재’는 자기에 대해[pour] 반성과 지각이 있는 상태이다.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 아노라는 ‘즉자 존재[être-en-soi]’에서 ‘대자 존재[être-pour-soi]’로 각성한다. 물론 자발적 각성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최종 심급인 돈에 아노라가 철저하게 복속된 상태이고 기적 같은 기회를 활용해 어떻게든 부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본의 철옹성과 계급의 벽은 아노라 같은 하층민에게 결코 돌파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적 같이 찾아온 기회에서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비자발적 배제를 겪으며 자신의 존재와 정면으로 대면한 아노라가, 오염돼 못 쓰게 된 자아의 불쾌한 껍질을 하나씩 걷어낸다. 영화는 이런 탈피를 우화(寓話)로 보여준다. 갖지 못한 자에게 존재의 존엄이라는 건 사실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그냥 갖지 못한 자가 아니라, 아노라처럼 인생의 바닥으로 밀려 몸만이 자산인 계급에는 존재의 존엄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다. 존재의 존엄을 성찰하기보다 생존의 엄중을 각성하는 데에 급급하다.
가진 자의 일원이 될 기회를 거머쥐었다가 다시 갖지 못한 자로 전락할 때 그 전락에서 존엄의 섬광을 목격하곤 나름의 존엄성을 깨닫는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질수록 각성이 더 치열해진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 역설에서 깨닫는 존재의 존엄은 가진 자들이 말하는 존재의 존엄과 다르다. 그 존엄은 존재의 절벽에서만 목격되는 단층 같은 것이어서 추락할 때만 목격할 수 있다. 실존의 관점에서는, 존재의 공허를 휘저어 존엄을 끌어낸 것이기에 더 고양된 존엄이라고 말해야 한다. 부엌데기가 신데렐라가 되어 그 상황에 머물렀으면 절대 경험하지 못하였을 고양이다.
사랑
사랑에서도 비슷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은 사랑의 당사자가 ‘즉자 존재’를 벗어나 ‘대자 존재’가 되며 시작한다. 고정적 자아에서 열린 자아로 바뀌어야 사랑할 준비가 된다. 나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 나 안[en]의 고립에서 탈출해 나를 누군가를 위한[pour] 존재로 탈바꿈할 준비를 해야 사랑에 뛰어들 수 있다.
사랑은 실존과 비슷하다. 대자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반합의 과정을 겪지는 않는다. 나에서 고양된 또 다른 나로 가는 변증법의 전개로는 사랑을 설명할 수 없다.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나를 벗어나려는 몸부림과 사랑이 결부된다.
“우리가 어디에 있지?”
단순한 질문이다. 보통 “여기가 어디야?” 정도의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영화 <라라랜드>(2016년)의 대사다. 두 주인공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대화 중에 미아가 묻는다. 우리가 어디에 있냐(Where are we?)고.
세바스찬이 지명을 얘기하자 미아가 정정한다.
“내 말은 우리,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고(No, I mean we, where are we?)”
세바스찬이 대답한다.
“우린 그저 표류 중이야(We're just...drifting.)”
<쉘부르의 우산>(1965년)의 리메이크나 다름없는 <라라랜드>의 유명한 대사다. 이 짧은 대화에서 우리(We)의 의미가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를 사랑으로 바꿔도 크게 문제 있는 독법이 아니다.
<라라랜드> 대사로는 “Where are we?”를 “Where?”로 받아들인 게 ‘즉자 존재’, “We?”로 이해한 게 ‘대자 존재’ 발상이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어도 각자라면 두 사람은 그저 우연히 그 공간에 위치할 뿐이다. 반면 한 공간에 있으며 각자인 둘을 함께라고 인식한다면 ‘우리’라는 공간을 새롭게 구축하게 된다. ‘우리’라는 공간은 그리피스 공원 같은 지명을 넘어선다.
거기서 멈춰선 안 된다. 사랑은 고양돼야 한다. 고양되지 않은 사랑은 표류한다. 사르트르 용어를 계속 쓰면 사랑을 위해 ‘타자를 위한 존재(être-pour-autrui)’로 바뀌어야 한다. 함께인 각자만으론 사랑이 시든다. 서로가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서로를 ‘타자를 위한 존재’로 유발해야 한다.
‘타자의 시선(le regard d'autrui)’은 삶과 사랑의 준거로 매우 중요하다. 사랑은 기쁜 일이지만 품값이 많이 드는 일이다. 나를 ‘대자 존재’로 각성하고, ‘타자의 시선’을 예민하게 수용하며 ‘타자를 위한 존재’로 비변증법적으로 지양(Aufhebung)되어야 하기에 그렇다. 한쪽만이 아니라 둘 다 그렇게 되어야 하기에 사실 진짜 사랑은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기적은 포기되지 않는다. 인간은 기적을 꿈꾸는 종이다. 신이 인간을 설계하며 초월과 합일의 기적 열망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기적의 대표 항목이 사랑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불가능성의 선물이 사랑이다. 신데렐라에서 다시 원래의 신분으로 전락한 아노라에게 그런 기적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
영화 <아노라>에서 이고르(유리 보리소프)가 그런 사랑으로 아노라에게 다가온다. 영화의 말미에 이고르가 일종의 청혼처럼 내민 큰 캐럿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유머와 위트로 버무려진 베이커 표 사랑의 상징이다. 이고르의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은 앞에도 많긴 하다. 극중 다이아몬드가, 사랑이란 것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분출해 환한 빛을 발한다는 이야기를 전한 것일까. 그리하여 그들은 표류를 멈추고 행복하게 살았을까?
안치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