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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즁 필름 Jun 25. 2017

<박열> 리뷰

남다르고 유쾌한 투쟁기록.

오랜만의 리뷰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비수기였는데요. 기대했던 영화들이 없었던 시기가 지나갔습니다. 간간히 영화를 보긴 했습니다만, 리뷰로 발행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이 완성된 적이 없어서 굉장히 공백이 길어졌네요. 그런 저를 다시 브런치의 글 쓰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준 영화 <박열>입니다.


박열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도쿄가 무대입니다. 그때 당시 일본 안에서 독립운동을 했었던 박열이라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대지진으로 혼란스러워진 상황이 벌어진 일본에서는 오히려 천황의 권위가 의심받고, 시위와 공황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의 정부는 그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돌리고, 모면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혼란을 틈타 벌어진 학살에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이 희생됩니다.


그런 암울한 시대에 펼쳐지는 독립운동가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사실 아무리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고 이제훈이 나오는 영화라도 너무나 뻔한 전개가 예상되었던 작품이기에, 그렇게까지 기대를 품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민족이 강조되고, 너무나 극명한 악한 세력이 정해져 있는 영화는 그렇게까지 극적이기 힘드니까요. 특히나 그것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었을 것이고, 이런 방식의 전개는 보통 너무나 과한 이야기들의 나열로 관객을 어떤 생각 속에 사로잡히게 하기도 하니까요.


물론 <박열>이 그런 영화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좋아할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싫어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주되게 다뤄보려고 합니다. 그럼 리뷰 시작할게요.

그림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정말 어찌보면 못말리는 문제적 인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들은 관객들이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건 일제시대라는 암울한 시대의 그것도 일본의 도쿄에서 벌어진 어찌 보면 사람들에게 전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기억하자는 것일 것이다. 이런 영화의 중심 내용보다는 나는 좀 더 다른 부분에 눈길을 돌려보려고 한다.


자신감

영화는 박열이라는 캐릭터와 걸맞게 극의 모든 부분에 자신감과 선 굵은 연출이 있다. 정말 시작부터 실소를 머금게 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하는 이야기는 "이 이야기는 사실에 기반하여 고증된 사실입니다. " ,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 들입니다"로 시작한다. 보통 영화, 드라마, 예능에서 시작할 때에 이야기하는 "이 이야기는 모두 허구입니다. 겹치는 이야기는 완전한 우연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당연히 사실에 기반을 둔 역사극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토록 강조하다니. 그만큼 감독은 박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참 많은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였다. 특히나 그런 애정을 관객들이 공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달까. 생각해보니 영화의 후반부에는 오히려 그런 애정이 극 중의 후미코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 그만큼 감독은 영화 안에서의 두 주인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특히나 고증에 힘을 기울였던 것을 강조함으로써, 혹시나 영화 속에서 보이는 이른바 '저게 가능해?'라는 장면들에 대한 힘을 실어준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자신감이라고 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고 내가 느낀 이상한 자신감은 한 가지 더 있는데, 극 중 정말 일본어를 잘하는 모든 사람들은 알고 보면 대부분 한국 배우들이다. 심지어 자경단에서 발음을 말하며 따라 해 보라는 사람조차도 사실은 한국 배우이다. 얼마나 일본어 발음 연습을 했을지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사실일까 아닐까?

영화는 지진 전까지는 사실 약간은 지루하다. 박열의 시를 낭독하는 가네코의 "바꾸여루?" 라는 말이 실소를 머금게 하지만, 초반부에는 내가 대표적으로 예상했던 어떻게 생각하면 기시감이 들 정도의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자꾸 심경을 거스르는 장면들이 스크린에 채워진다.

정말 동거할 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들의 사랑이 얼만큼일지.

후미코가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바로 반해서 동거까지 가게 되는 이야기. 박열이 조직했던 조직은 여러 번 이름을 바꾸며 존재감을 찾는 어찌 보면 독립운동계의 흙수저 시절이라는 것. 조직 내의 배신이라 하기에도 초라한 결연보다는 장난에 가까워 보였던 그들의 행동과 회의. 분명히 영화는 사실에 기반하여 충실하게 고증했다고 했는데? 오히려 이게 사실일까. 아니라면 극의 재미를 위해 꾸민 부분이려나. 영화는 자꾸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영화적 재미와 현실적 고증의 사이에서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하는 느낌.


하지만 이런 방법은 내가 여태 역사극을 보면서 느껴보지 못한 장면들이다. 너무나 사상적인 프레임에 가둬져서 특정한 생각 발 뻗지 못했던 영화들. 역사적인 사실에 짓눌려서 오히려 그 인물보다는 시대와 상황에 집중해서 그 인물은 제대로 빛 보지 못한 영화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박열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영화를 끝까지 보는 내내 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이야기가 정말로 사실일까? 를 내내 생각하게 되는 신비한 전달 방식이었다.

다같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조차 참 신기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누군가는 왜일까 가슴이 뜨거워지고, 누군가는 나라면 저럴 수 있었을까를 생각한다. 어찌 보면 굉장히 현실 속 열악함 속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무엇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설사 그것이 같은 한민족이 아닐지라도 뜨거운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영화는 그런 점들을 고조 시킴과 동시에 자꾸만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설마 정말 저렇게 했을까? 싶은 장면들은 사실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계속 생각이 들게 한다. 때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때로는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하지만 그 자체가 영화의 주인공인 박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함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관계 역전? 우리가 몰랐던 일본

관동대지진 이후의 이야기들은 관객들을 분노케 하기 충분하다. 자경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일본어 발음을 시켜보며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이야기. 오히려 감옥이 안전하다면서 감옥으로 피신하는 박열과 불령 선인들. 그러면서 계속해서 조선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일본 정부와 미즈노 내무대신 등. 그때까지는 그랬다. 평소에 관객들에게 박혀있는 강점기 시대의 이미지.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당연히 보다 보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장면.

이 대신들은 극 중에서 유달리 한심하게 나온다.

하지만 박열에게 검사가 배정되고, 그를 재판에 넘기게 되면서 이야기는 반전을 맞이한다. 일본의 정부도. 검사도. 그리고 이 모든 걸 기획한 미즈노도 모두 박열에게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에게서 발산되는 강한 "개새끼"의 향기. 극 중 처음 가네코가 단박에 반해버렸던 그 매력은 슬슬 관객에게 흩뿌려지기 시작한다. 박열과 후미코는 영화 내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계속한다. 피해자의 입장인 우리가 봐도 무엇인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자꾸 극 중에서 일본은 거기에 끌려다닌다.

사실 제일 불쌍해 보였던 검사양반.

바로 문명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일본과 그래도 전체주의적, 종교적인 부분을 계속해서 과하게 지키려고 하는 일본 사회 안에서의 충돌이 자꾸만 이런 희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건 오히려 그때 시대의 일본을 평가절하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지금에 와서도 그렇게 달라지지 않은 일본에 대한 감독의 의중일 수도 있다. 그것도 사실 원래 박열이라는 인물이 그때 당시 문제적 인물이 아니라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야기는 흥미롭다. 무엇인가 처절하고 힘들고 괴롭기만 했을 시대상 황보 다도 웃기고 아이 같고 그렇지만 가슴 한구석에 있는 칼을 끝까지 놓지 않는 그 무엇에 흔들리는 가해자. 관객들은 여기서 정말 여태 잘 느껴보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후미코 그리고 최희서

(찾아보니 브런치도 있다. https://brunch.co.kr/@megaboxpy )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여주인공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관람 전에 잠시 본 필모에서 이준익 감독의 동주에 나왔다는 사실만을 알았는데,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후미코는 박열만큼이나 그 시대에서 나오기 힘든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한 최희서도 정말 대단한 연기였다.

자서전 읽어보고 싶다.

사실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에서 여성이 주목받았던 것은 그렇게 역사가 깊지 않다. 근래에 가장 인기 있었던 영웅물이 '원더우먼'인 것을 보자면, 어떻게 보면 왜 없었을까를 반문하게 하기도 한다. 그나마 암살에서 전지현이 보여준 것이야 말로 그나마 높아진 것을 반영한달까. 처음 박열과 사랑에 빠질 때까지만 해도, 사실 아마 이 캐릭터에 그렇게 기대를 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관객의 뺨도 얼얼해질 만큼의 장면이 나왔으니. 바로 '동거 수칙'에 적혀있던 것을 박열이 어기자, 박열의 뺨을 찰지게 날려준 그 장면이 바로 후미코를 다르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시대까지도 핸디캡인 것은 그녀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여성. 일본인. 아나키스트. 단어만 열거해도 사실 평범함과 거리가 있을만한 캐릭터이다. 그것도 독립운동을 다루는 이야기 안에서. 심상찮음을 보여줬던 후미코는 극 중반을 넘어서면서 정말 놀라움을 자아내게 하는 일들이 많다. 경찰서를 따라서 들어와 같이 있는 장면. 박열이 이송될 때에 선창으로 시작하는 노래. 같이 감옥에 가서도 박열에게 오히려 자신이 과외교사 라면서 검사에게 진술하는 부분. 아니 사실 검사와의 모든 대화 하나하나. 그리고 아나키스트로서의 일본 천황에 대한 반감. 자신의 목표. 어느 것 하나 말할 때마다 그 당시 시대와 정면으로 대척되는 지점의 문제적 인물임이 나타난다.

천황을 죽이라는 짤을 찾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없다.

그래서 영화의 막바지가 되면, 오히려 박열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보다 후미코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를 더 궁금하게 된다. 영화 초반에서는 후미코의 이런 행동이 정말 사실 본인 그대로의 사상일까. 아니면 박열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행동하게 된 것일까를 생각하다가, 후반부에는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하고, 모든 것 하나하나를 자신이 결정하는 그 무엇인가가 느껴질 때부터 후미코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흡사 마지막의 법정 씬에서의 후미코는 정말 간담을 서늘케 하는 부분이 많다. 어떻게 보면 후반부에서의 검사가 관객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만큼 압도적이다. 내가 박열을 보고 나와서 가장 먼저 검색해서 찾아본 것이 박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이었으니 말이다.


둘의 사진

정말로 그때 당시의 이 문제는 굉장히 핫했으리라. 사상범. 그리고 천황 황태자 시해 모의를 한 사람들이 저런 사진을 찍었으니 말이다. 처음 사진을 찍을 때에도 놀라웠지만, 마지막에 그 사진을 찍는 모습을 다시 보여준 장면도 놀라웠다. 그 사진은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에도 찍기에 힘들 수 있는 사진일 것이다. 박열은 자연스럽게 가슴 위로 손이 올라가 있고, 후미코는 그것과 관계없니 책을 보는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사진.

그것은 극 중에서는 분명 부모에게 보내는 사진이라고 했지만, 아마 몰라도 박열은 그것만을 위해 저런 사진을 찍지 않았을 것 같다. 애초에 박열이 자진해서 교도소에 들어가고, 암살 계획을 오히려 자극적으로 말한 것도 전부 어찌 보면 그 당시의 독립운동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꼭 부모에게만 보여줄 것이 아닌, 이 사건에 관심이 있는 일본, 조선에 대한 어찌 보면 통쾌한 한 방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장면에서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 가 떠오른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 사진의 실제 사진이 나오는데, 정말 영화 속 포즈와 같았다. 지금 같은 시대에도 찍기 꺼려질 수 있는 사진을 그때 당시 구치소에서 찍었다니 사실 쉬이 상상이 가지도 않고, 그만큼 그들의 특별했음을 사진 한 장을 보면서도 많이 느껴진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앞서 언급했던 모든 것들은 어쩌면 영화의 특이한 점이지 사실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때 당시 일본에 있었던 지진에서 왜 조선인들이 무차별하게 학살당했어야 했는지 영화는 잘 설명하고 있다. 예고편에서도 나오는데, 내부의 결속을 위해 외부세력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극 중에서 조선인 기자는 오히려 박열이 그러한 음모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그때 당시 시대상황에서 박열의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일본의 관료들에게 이용당했을지 모른다.

(늠름)

하지만 그만의 유쾌한 방식으로. 그리고 후미코까지 같이 한 운동으로 그들은 이용당하려고 했던 것들을 멋집 게 뒤집는다. 보면서 가장 통쾌했을만한 부분은 후미코가 한복을 입고, 박열은 관복을 입은 상태에서 재판정에 들어온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연한 모습 뒤에는 어쩔 수 없이 펼쳐진 민족의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아픔을 말하는 것도 결코 비굴하거나 조아리는 모습이 아닌 그들만의 방식으로 법정에서 일본을 꾸짖었던 모든 것들이 정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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