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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민 Mar 10. 2024

이름 모를 편집장님께 보내는 편지 #1

안녕하세요. 드디어 메일을 씁니다.

지난번 메일을 받고 며칠 내로 답장을 보내드릴 거라 생각했던 건 저의 크나큰 착각이었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저는 끙끙 앓고 지냅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이번 책 원고를 쓰면서 아, 재밌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일본에 온 지 6일이 지나서야 말이죠. 부디 이 마음이 너무 쉬이 증발되지 않기를 바라며 1장을 마무리했습니다.


마감기일까지 시간이 촉박하지만, 그래도 1장을 제 손에서 떠나보내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생긴 기분입니다. 궁금하고 답답하셨을 마음, 꾹 참고 제 연락 기다려주셨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가끔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 보면 그냥 손가락이 절로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생각을 일단 적고 보자, 는 심산이죠. 그럴 때마다 제 입에선 '아, 정말 개소리네. 누가 이런 개소리를 읽어줄까'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볼 때마다 상스럽지만, 정말 개소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원고를 보내려고 하면 개소리고, 또 보내려고 하면 개소리여서, 보냄이 늦어졌습니다.


말도 안 되는 핑계지요. 압니다.


조금 궁금하실까 하여 말씀드려보자면 저는 도쿄 인근 신유리가오카라는 곳에 터를 잡고 한 달 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와 그리 멀지 않은 익숙한 곳입니다.


워낙 긴 기간이다 보니 저렴하게 집을 구했는데요. 2층짜리 단층 아파트입니다. 일본에서의 아파트라는 개념은 저가에 조금은 부실한 이미지가 동반됩니다. 알고 빌린 집이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유학하던 시절에도 절대 안 빌렸을 그런 집이었습니다. 집주인이 건담 마니아인지 벽은 온통 새빨갛고, 군데군데 건담의 이미지를 영상화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2층 끝집인데요. 집주인은 이 아파트 소유자로서 총 24개의 집 가운데 2개만 에어비앤비로 돌리고, 나머지는 평범한 직장인과 학생들이 살고 있습니다. 저의 방은 건담이란 콘셉트에 맞게 현관문부터 다르게 생겼습니다. 다른 문들은 지극히 평범한 그레이톤인데, 제 방만 시커멓게 칠해진 정체 모를 로봇이 그려져 있죠. 바깥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 때마다 이상한 세계로 넘어가는 건 아닌지 이질감이 들기도 합니다.


부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좁은 공간이 제가 머무는 방과 맞닿아있는데요. 오래된 건물이라 환풍구가 따로 없어서 집에서 내뿜는 연기는 죄다 복도로 배출됩니다. 제 방은 끝방이라 말씀드렸지요. 외부 계단을 올라와 제 집에 도착하기까지 약 15미터 정도를 걸어오는 그 사이에 여러 집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냄새를 내뿜고 있죠. 길지 않은 그 구간을 걸어오면서 아, 오늘 이 집은 카레를 먹는구나. 이 집은 뭔가 간장조림의 반찬을 만드는구나. 하고 얼굴 모를 이들의 밥상을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구식은, 그러니까 오래된 것들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을 지녔나 봅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그저 수화기 앞에 앉아 상상하게 되는 그런 기다림의 모습들처럼요.


처음엔 책상에서 화장실 가는 사이에도 몸이 여러 번 이곳저곳에 부딪혔습니다. 제가 뚱뚱한 걸까요. 이 집이 좁은 걸까요. 화장실을 들어가는 길도 만만치 않습니다. 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작은 문턱 하나뿐인데, 변기에 앉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너무 좁아서 몸을 그냥 막 돌렸다가는 벽이며 문에 부딪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서울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우아하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제 몸을 사수하기 위해서죠.


그래도 사람냄새나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이 공간에도 어느덧 생활감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도 들었어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있다가 부엌 싱크대 앞에 서고 빨래를 널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선이 그리 길지 않아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냥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그런 모습일 겁니다. 그래서 정도 들었나 봅니다.


보통 8시 반에서 9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바로 나가요. 3km 정도 뜁니다. 돌아와 아침을 차려먹고, 설거지를 끝낸 뒤 양치질을 하며 노트북을 켭니다. 그렇게 앉아 있다가 오후 네시 반이 되면 저녁을 차립니다. 기껏해야 야채볶음 정도인 요리인데, 차리고 그릇을 씻고, 하는 데 시간이 훅훅 가더군요. 그래서 오늘부터 하루 한 끼로 줄였습니다. 메뉴도 카레로 바꿨죠. 지금 제 옆에는 야채 카레가 한솥 가득 있답니다. 밥 먹는 시간 아낀다고 좋은 글이 나오는 건 아닐 텐데요.


저녁때까지 쓰고 나서 세수를 하고 괄사를 하며 미스터 선샤인을 봅니다. 대사가 감칠맛 나는 드라마죠. 대사 하나하나 따라 읽으면서 저런 대사를 어떻게 쓰는 건가, 생각하고 엉덩이 힘에서 나오는 것인가, 생각하다 다시 원고를 씁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무슨 대단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나오는 문장이라 봐야 고작 한 두 문장 정도. 정말 느리게 걸어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새벽 두 시 정도에 잠자리에 드는데요. 체력이 많이 떨어진 듯하여 오늘부터는 취침 시간을 앞당겨볼까 합니다.


잘 지내시죠?

원고 꼭지는 사라진 것도 늘어난 것도 있는데 아직 미완성인 상태이긴 합니다. 쓰면서 계속 생각도 자료도 바뀌어가다 보니 끝없이 수정할 거리 투성인데요. 좋지 못한 습관이겠지요.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2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내일부터는 한국도 봄이라는 속보가 아까 휴대폰에 뜨던데요. 이곳에도 벚꽃이 피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질 테니 속도를 내야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여기도 나무들이 비어있거든요. 부디 초고를 잘 마치고, 후련한 마음으로 벚꽃 사진을 찍을 수 있기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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