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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작가 Mar 14. 2024

청명하다

햇빛이 사라지고 노을이 지기 직전의 하늘

청명하다
1. 날씨가 맑고 밝다.
2. 소리가 맑고 밝다
3. 형상이 깨끗하고 선명하다.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햇볕이 걷히고, 노을이 지기 딱 직전의

구름 한 점 없이 시리게 맑고 높은 하늘.

가만히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하늘.


요즘 Earth, Wind&Fire의 <September>에 빠져있다.

아직 9월이 오려면 멀었다는 걸 알지만, 

막 계절이 바뀌려고 하는 애매모호한 계절의 하늘과는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노래다.

그래서인지 청명한 하늘을 자주 보게 된다.


교복을 입고 웃고 떠들며 지나가는 한 쌍의 학생을 지켜본다.

해맑게 웃는 그들의 얼굴 위로 어릴 적의 내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얼굴이 머리 위의 하늘처럼 청명하다.


지나가버린 한 때의 기억들이 형태 없이 흐릿하게 다가온다.

정확히 어느 순간이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뭉뚱그려진 그 시절의 모습들이 가슴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사진처럼 멈춰진 순간의 기억이 아니라

영화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얼굴들.

아름답게 뭉개진 장면들이 곱게 접힌 편지지처럼 부드럽다.


매 순간 미래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다.

오로지 기분과 감정만 담긴 글자 없는 편지를.

우표도 붙이지 않고, 우체통에 넣지도 않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휙 보내버리고 만다.

보낸 날짜도, 받는 날짜도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일단 보내놓고 나면, 언젠가 분명히 도착한다.


편지를 받고 보니

슬프지도, 씁쓸하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신나거나 즐겁거나 기쁘지도 않다.

그저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이젠 지나가버린 순간들이 소중했음을 문득 깨달아버리곤

찰나의 순간에 나는 어른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계산법으로 나이를 먹어간다.


그때 올려다보는 청명한 하늘.

그래, 그때도 분명 이런 하늘이었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하늘을 보고 있다.

그리고 미래의 나도, 분명 보고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 나이 먹는 일이 쓸쓸하지 않은 이유는

계속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방금 보낸 그 편지도 언젠가 도착하겠지.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편지를 펼쳐보며

그날의 너도 분명 웃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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