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작가 Apr 11. 2024

텅 비다

이삿짐을 모두 빼낸 방


1. 큰 것이 속이 비어 아무것도 없는 모양.
비다
1. 일정한 공간에 사람, 사물 따위가 들어 있지 아니하게 되다.
2. 손에 들거나 몸에 지닌 것이 없게 되다.
3. 할 일이 없거나 할 일을 끝내서 시간이 남다.


처음 독립하던 날 아침, 분주하게 짐을 옮겼다.

테트리스 하듯이 상자와 가구를 끼워 넣고 보니

절대 꽉 차지 않을 것만 같았던 트럭 뒤편이 빼곡했다.

1톤도 채 되지 않는 살림을 싣고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섰다.

그날은 제법 따뜻한 봄날이었는데도, 방바닥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텅'은 부사이고 '비다'는 동사이다.

엄연히 말하자면 '텅 비다'라는 말은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텅'은 '비다' 말고는 뒤에 달리 붙일 말이 없고,

'비다'는 앞에 '텅'이 붙지 않으면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서로를 붙여주어야만 완전해지는 말들이 있는 법이다.

'텅 빈 내 방'처럼.


텅 비었다는 말은 구멍이 났다는 말과는 다르다.

구멍은 완전한 것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흠집인 반면,

텅 비우는 행위는 불완전했던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니까.


모순적이지 않은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이토록 완벽하게 표현하는 말이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텅 비다’의 반대말은 ‘꽉 채우다’이니까 말이다.

이미 가득 찬 공간에는 더 이상 무언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유리잔을 비워야만 물을 따를 수 있듯이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

비우는 행위는 채우기 위한 본질적인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결국 텅 비었다는 건, 아직 아무것도 채우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텅 비었다는 말은,

공간에만 해당되지 않고 인간의 일상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이사를 마친 다음 날, 엄마로부터 강아지 사진이 왔다.

모모가 내가 없는 방에 괜히 들락거린다는 것이다.

"네 방이 텅 비니까 허전한가 봐."

모모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 말을 하고 싶은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장녀들이라면 누구나 사용한다는 현관문 옆방.

아무리 비워낸다고 한들, 내가 그 방에 살아 숨 쉬었다는 사실까지 사라지진 않는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는 종종 공간이나 마음을 텅 비우게 될 때가 있다.

모든 짐을 빼서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해도

텅 빈 구석에 남은 과거의 기억까지 모두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완벽하게 ‘텅 비워진’ 상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유아 시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삶에서 그 부분만 도려내서 없는 셈 칠 수는 없다.

당시의 기억은 무의식의 저변에 존재하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지금은 텅 비었지만, 분명 나의 존재로 가득 차 있던 방처럼

지금은 떠나고 없지만, 분명 상대의 존재로 가득 차 있던 마음처럼

세상에는 온전하게 비워진 공간도, 인간도 없다.

이 세상에 ‘완전무결하게 아무것도 없었던‘ 때는 단 한순간도 없다.


텅 비었다는 말은 완벽한데,

이 세상에 완벽하게 텅 빈 공간은 없다는 것이

바로 ‘텅 비다’는 말의 모순점이 아닐까.


그렇다고 비참할 필요는 없다.

엄마는 결국 내 방에 가구를 들이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텅 빈 큰 딸의 방은

쭉 유지해 오던 가족 구성의 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삶의 새로운 방향을 알리는 시작이기도 했다.

텅 비워낸 곳을 다시 무엇으로 채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사전 참고 : 네이버 사전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청명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