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밖은 지옥일까? (1)
1.
한 번은 성수 쪽에 일이 있어 지하철 서울숲 역에 내린 적이 있었다. 무심코 역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하나 보였다. 바로 직장 다닐 때 함께 일하던 여직원이 내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오만 가지 생각을 했다. 가장 먼저는 뒷통수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곧바로 이성을 차린 후로는 그 앞으로 다가가 '밥은 먹고 사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반말을 할지, 존댓말을 해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분명 내가 뽑았던 부하 직원인데 하마터면 내 상사도 될 뻔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그 트라우마가 아직도 내 뇌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거였다. 한때는 그 사람의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만 들어도 내 심장이 뛸 정도였다. 그만큼 욕심도 야망도 큰 친구였다.
2.
하루는 회사 사장이 내게 전화를 했다. 내가 뽑았던 그 사람이 내 팀장이 될 거란 통보였다. 그 전날 필요하다면 팀장 자리를 내놓겠다는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모르고 한 말이었다. 나는 원래 웹사이트 기획자였다. 그러나 사장의 책의 대필하면서 그 회사로 스카웃 되었다. 그 회사는 책을 만들고 컨설팅을 하는 회사였다. 그러나 글솜씨 하나만으로 한 권의 전문지를 만드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백지 상태에서 또 하나의 백지 같은 신입 사원을 뽑아놓고 보니 일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경력직으로 뽑은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다. 사내에서 영향력이 높던 팀장의 추천으로 온 그녀는 눈이 부리부리한 사람이었다. 면접에서의 대답도 태도도 만족스러워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능력없는 팀장임을 파악한 그녀는 곧바로 사사건건 자기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출판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대부분의 의견을 수렴했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녀와 나의 자리는 곧 바뀌었고 얼마 후 나는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3.
나는 가끔씩 그녀가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럴만도 한게 2,3년이 지난 후 회사의 거의 모든 직원들이 그녀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팀원이 없는 팀장으로 일하다 회사가 어려워진 시기에 나도 그녀도 회사를 나왔다. 그러나 회사를 나온지 10년 여가 지난 지금, 나는 그녀를 더는 원망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내게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경력 없이 회사를 함부로 옮기지 않아야 했다. 옮겼다면 그에 맞는 지식과 경험을 쌓기 위해 좀 더 노력을 해야 했다. 내게 맞는 일이 아니라면 빨리 회사를 나와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때의 내게는 그런 판단력도 분별력도 없었다. 오로지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어떻게든 회사에 남으려다 보니 스스로를 낮출 수 밖에 없었고, 그저 월급만 받아가는 무능력한 직원이 됐다. 만일 내가 다시 회사를 다닌다면 더 나은 선택,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비단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나 뿐인 것일까?
4.
종종 한 번도 회사를 가지 않은 신화적인 아버지들을 만나곤 한다. 직접 만난 것은 아니고 얘기만 들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회사 조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모에, 혹은 부인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영문도 모른채 견디는 회사 생활을 하곤 한다. 나는 첫 직장에서도 그랬다. 나는 나이는 적지만 상사인 팀장이 바로 반말을 하는 것부터 못견뎌했다. 8시 출근 시간을 지키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 기획을 하는데는 능했지만 그걸 실행하는데는 미숙했다. 지금도 일요일이면 와이프 성화에 못이겨 너댓살 된 아들과 함께 놀이터를 배회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내 앞의 아들을 눈으로만 응시할 뿐 함께 놀아주지 못했다. 바로 그 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머릿 속은 언제나 회사 일로 가득했다. 그러나 걱정만 앞설 뿐 뚜렷한 해법은 없었다. 그때 내가 아이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했다면 지금의 아들이 그래도 조금은 더 활기찬 아이가 되지 않았을까?
5.
첫 직장을 2년 정도 다녔다. 그 다음 직장은 4년, 우연한 기회에 들어간 세 번째 직장은 7년을 다녔다. 그리고 다시 2년을 스타트업에도 일하다가 홀로 독립했다. 그러나 자문 역할을 했던 스타트업에서의 2년을 빼고 나면 직장 생활을 대부분은 우울했다. 물론 15년 내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반짝 반짝 회사에서 인정을 받을 때도 있었다. 우선 나는 PT에 강했다. 세 번째 회사에선 사내의 3대 이빨로 통할 만큼 발언력이 있었다. 회사 SNS를 운영하는 데에선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웹사이트 기획자로 일할 땐 '빈틈 기획자'로 불릴 만큼 인정을 받지 못했다. 브랜드 전문지에서 일할 땐 끝내 글 잘쓰는 에디터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웬걸, 지금 나는 글쓰기로 주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오히려 강연은 부수입을 올리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나를 원하지 않는 시장에 나를 어필하려고 애를 쓴 셈이다. 잘 될리 만무했다. 나는 어쩌면 회사에 부적응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는 상품을 잘 모르는 세일즈맨은 아니었을까?
6.
회사를 나오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었다. 다행히 내게는 회사 밖이 지옥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걔중에는 나에게 첫 번째 일을 준 작은 화장품 회사의 대표가 있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내게 일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일일이 데리고 다니며 다른 회사 대표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럴 때마다 명함 한 장 없이 미팅에 나오는 나를 위해 명함도 만들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툴기 짝이 없는 교육과 컨설팅을 감내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첫 해를 넘길 수 있었고 이렇게 7년을 이어올 수 있었다. 비로소 내가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 '특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깨달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지금은 그들도 나도 그저 직장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린 친 결과라는 객관적인 시각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7.
다행히 요즘 세대는 직장생활을 무조건적인 선택지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회사를 가지 않더라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대학도 의대를 제외하고는 그 인기가 옛날만 못한 것 같다. 안정적인 직장으로 인정받던 공무원도 이제는 그 열기가 한풀 꺽인게 분명하다. 그렇게 인기 있던 교대는 이제 많은 학생들이 기피하는 학교가 됐다. 여전히 대기업을 선호하지만 그 만큼 중도에 퇴사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무엇보다 SNS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을 직접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꼭 먹방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지만 알찬 사업을 하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 바로 나같은 사람도 있다. 지금의 나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에게 내가 무슨 일을 해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제값을 받고 일할 수 있는지의 노하우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8.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나는 그녀는 당시 내가 일하고 있던 공유 오피스 근처에 사무실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끝내 그녀를 앞지르지 못했다. 그러기엔 내 마음 속 상처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하지만 갈등은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좋은 팀장이었다면 그녀가 그런 빌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때의 나는 나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나의 강점과 경쟁력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글을 쓰고 싶다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직장을 선택했다. 무엇보다 나는 조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직의 권위에 쉽게 순응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조직을 바꿀만한 리더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일하는 장소와 시간을 직접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타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일하게 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이해하게 되면서 내 일의 결과도, 좋은 관계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9.
브랜드 용어 중에 '퍼스널 브랜딩'이란 말이 있다. 지금까지 브랜딩은 많은 경우 제품과 서비스, 회사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개인의 브랜딩도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한 개인이 타인에게 자신의 역량과 영향력을 돈을 받고 파는 것이 바로 '퍼스널 브랜딩'이다. 그리고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다. 브랜딩이란 쉽게 말해 내가 가진 것을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는 제품 혹은 서비스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고, 또한 시장이 그런 나를 필요로 하는지 알아야 한다. 지금의 내가 과거 직장을 다닐 때의 나보다 조금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신은 조직에 있을 때 빛을 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홀로 자유롭게 일할 때 더 나은 성과를 내는 사람인가. 후자라면 당신은 회사가 아닌 시장이 원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우리가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