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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 Oct 10. 2021

누워서 세계 속으로

촘촘하게 그려보는 하루 일과

고백하자면 운이 꽤 좋은 편이다. 수능 당일 그동안 못 보던 점수가 나온 덕에 상향지원이라는 것을 꿈꿀 수라도 있게 되었고, 재수학원 첫날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앞으로의 재수생 생활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던 중 오후 열 시에 추가합격 전화를 받아 무사히 대학 입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험과 면접에서도 노력한 것만큼, 혹은 그보다 약간의 좋은 결과가 늘 따라주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로또 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되는 일확천금의 기회는 없었지만, 한 끗 차이로 좋은 기회를 잡는다거나 중요한 날은 비 오던 날씨가 거짓말 같이 맑아지는 등 건조한 일상에 잠깐의 활기가 돌만한 소소한 수준의 행운이 있어왔다.


그렇지만 여행까지 막차를 타게 될 줄은 몰랐다. 마지막 여행지인 쿠바를 다녀온 게 1월 말에서 2월 초, 마스크를 쓰지 않고 활보할 수 있는 마지막 타이밍이었다는 것과 동시에 당시 구매했던 비행기 티켓이 예산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한 환불 불가 티켓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져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작년. 나만 못 가는 게 아니라 전 세계 모두가 똑같이 발이 묶였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 시점도 이미 지나버린 지금, 사무치게 여행이 가고 싶다. 쿠바 다음으로 계획했던 곳은 치앙마이였다. 정신없이 보이는 모든 것들을 눈에 담느라 하루가 모자란 유명 스폿도 좋지만, 로컬 식당과 골목을 구경하며 느적느적 걸어 다니는 게 전부인 이 싱거운 여행지가 유난히 다시 가고 싶은 건 모두 내려놓고 머리를 비울 휴식이 절실한 지금이라서 일지도 모른다.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소파에 축 늘어져서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정신없이 탐색하며 치앙마이의 풍경들을 스크랩한다. 매주 열리는 시장의 북적이는 분위기, 잘 짜인 라탄 재질의 수제 공예품들, 알록달록한 색깔의 디저트와 음료수... 차곡차곡 데이터가 쌓여갈수록, 상상 속의 치앙마이는 육 년 전에 방문한 치앙마이의 희미한 기억과 마구 섞여 뚝딱뚝딱 세트장 지어지듯 구축되어 한결 디테일하고 생생한 장소로 거듭난다.



나는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산책길을 걷는다. 잘 심어진 나무와 풀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마치 작은 숲을 지나오는 것만 같다. 레지던스 숙소에 딸린 수영장에서 유유자적 수영을 하며 졸음을 물리친다. 수영장은 넓고 길게 이어져 있어 다양한 영법을 연습하기에도 수월하다. 연습을 마치고 씻은 다음 간단히 허기를 채울 아침식사를 하고 치앙마이 대학교의 어학원으로 이동해서 외국인들과 함께 영어회화 수업을 받는다.

대학교의 거대한 앙깨우 호수를 구경하며 학교 식당 칸틴에서 학식을 먹거나, 대학교 근처의 로컬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곤 한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정한 룰은 하루에 한 번은 꼭 아무 정보 없이 감으로만 식당을 찾아가는 것이다. 남는 것이 시간이라는 데서 나오는 여유와 나름의 용기를 발휘한 덕에 몇 번의 실패를 딛고 현지인들이 즐겨먹는 식당을 여럿 발굴할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난 오후는 발 마사지를 받거나 치앙마이의 오늘을 기록하며 남은 하루를 나른하고 느린 호흡으로 보낸다.


어학원의 수업은 매주 월수금 이기 때문에, 수업이 없는 날은 가보지 못했던 여러 관광지를 구경한다. 지난주에는 낮에만 가본 적 있는 도이수텝 사원에서 새벽의 야경과 일출을 한꺼번에 구경했다. 활활 불타는 것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야경을 보다가 주변에 어스름한 푸른빛이 돌 때쯤 해가 뜨는 지점에서 일출을 구경하고 개운한 정신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번 주는 코끼리 보호구역에 가서 구조된 코끼리들에게 먹이도 주고, 머드 목욕도 시켜주는 체험을 할 예정이다. 순하고 귀여운 코끼리들을 직접 만져보고 보듬어 줄 생각에 기대된다.

나는 그곳에서 사귄 외국인 친구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며 약간은 그을린 피부와 한결 평안해진 마음가짐으로 귀국한다. 잔뜩 사 갖고 온 태국의 간식거리를 가족들과 나눠 먹으며 가끔씩 일상 속에서 치앙마이를 떠올리곤 한다. 지금까지 머릿속에 설계된 장면은 이렇다.


케코아(Kekoa)의 평화로운 선율을 들으며 하와이에 잠시 머물러 보기도 한다. 잔잔하게 흔들거리는 해먹의 리듬에 몸을 눕히고 낮잠을 자는 내 귓가엔 이따금씩 철썩철썩 치는 파도 소리만이 들린다. 패들보드 위에 곧게 선채로 바다 한가운데서 수평선 너머를 지긋이 쳐다보며 '물 멍'을 하기도, 우쿨렐레와 전통춤을 배워보기도 한다.

하와이는 아직까지 가 본 적이 없는 곳이기에 상상 속의 여행지가 빈틈없이 지어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운전면허도 없어서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누빌 수도 없고 동선도 비현실적인 데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접했던 하와이의 단편적인 모습만이 둥실둥실 떠다니다 말지만, 상상이 그래서 상상 아니겠는가. 그 속에서 나는 아무 대책없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아직은 멀었지만 기다려, 아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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