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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 Oct 17. 2021

취미와 헤어지는 법

그래도 해봤으니 된 거다

끊임없는 애정으로 진득하게 오래오래 즐기는 취미가 있는 반면, 열병처럼 잠깐 동안 뜨겁게 달궈졌다 이내 잠잠해져 버리는 취미가 있다. 나에게는 중국어가 그러했다.

드라마 <킹덤>의 외국어 더빙 버전 모음 영상을 보던 중 갑자기 중국어가 마음을 울렸다. 성조 때문에 시끄럽고 날카롭게만 들렸던 언어가 이렇게 차분하고 우아한 느낌으로 들릴 수도 있다니, 내 입으로 직접 이 언어를 말해본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집 근처 가까운 학원까지 전화를 걸게 된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앞으로 글로벌 시대가 온다며, 중국어를 배워보라고 엄마가 귀에 인이 박히게 잔소리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뜬금없는 타이밍에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새록새록 돋아날 줄 누가 알았겠나.


꽤 오랜 시간 운영해 온 동네 학원은 수업 상담과 기초 중국어를 담당하고 있는 한국인 원장 선생님과 중급반의 원어민 회화 수업을 진행하는 중국인 선생님이 계셨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뚜렷한 외모의 원장 선생님은 네 가지 성조부터 숫자, 시간, 가족을 부르는 명칭 등의 제로베이스부터 시작하는 나에 맞춘 기초 단어를 알려주셨다. 시니어 모델에 한창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선생님은 수업이 겹치지 않는 날마다 홈쇼핑이나 화보 촬영을 하며 쉬는 시간마다 에이전시를 통해 오디션을 보러 다닌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주셨다.


새 교재를 받고 들뜬 마음으로 인생 첫 중국어를 시작한 지도 한 달, 두 달이 지났지만 롤러코스터 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성조의 악센트는 입으로 완벽히 뱉어내기 어려웠고 원어민들의 속사포같이 빠른 대화는 아무리 들어도 뜻을 파악하는 데 익숙해지지 않았다.

분명히 몇 달 후면 기초 회화 정도는 더듬더듬거리며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갈 길은 멀어 보이기만 하고, HSK(중국어 능력시험) 자격증을 누구는 두 달만에 땄다는데 모두들 천재들인가? 누구도 시킨 적이 없이 자원해서 시작한 취미에서조차 열등감을 느끼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중급반으로 올라가 원어민 선생님과 수업을 하게 되었다. 이제 중급 수업을 받아도 되겠다는 판단으로 승급을 한 게 아니었다. 초급 교재를 모두 배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올라간 것이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았기 때문에 중국인 선생님도 나도 진전이 없는 대화에 서로 머쓱하기만 했다.

취미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만두겠다고 말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수십 번도 들었지만 중간에 그만두자니 열심히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의 얼굴을 보기에도 민망하고, 다른 이유도 아니고 잘 못하기 때문에 끝내야겠다는 말을 꺼내야 되는 게 자존심이 상해 선뜻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코로나는 점차 심해지며 학원은 잠정적으로 운영 중단이 되었다. 원어민 선생님은 중국에서 가족들이 얼른 돌아오라는 성화에 귀국을 하게 되었고, 선생님은 오랜 시간 운영하던 학원을 정리하고 시니어 모델로의 길에 집중하기로 결정하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중국어 공부를 관두게 된 학생이 할만한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양새로 일 년간의 중국어 공부는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누구 하나 서로 아쉬운 것 없이 갈 길을 가는 아주 산뜻한 헤어짐이었다. 비록 취미로 시작했지만 유창하게 중국어를 구사하는 상상을 했었다. 꿈이 실현되었다면 물론 좋았겠지만 해보고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미련 없이 탁탁 털어내는 것도 꽤 의미 있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 노래만 불러댔을 것이며 맞지 않는 취미라는 사실을 영원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좀 더 오랜 시간 즐겁게 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취미를 찾기 시작했고, 중국인 선생님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원장 선생님은 그 후 홈쇼핑에선 판매하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아빠로, 인기 드라마에선 멀끔하게 정장을 입은 회사의 중역으로 한 마디 짧은 대사까지 받으셨다. 금빛이 차르르 흐르는 화려한 배경에서 연예인과 트위스트를 추며 건강음료 광고에도 등장하며 포트폴리오를 알차게 채워 나가는 선생님.


모두의 새로운 다음 스텝을 응원하며 희미하게 기억 속에 남은 쌩 기초 중국어를 짜내어 말해본다. 짜요, 라오쉬! (jiā yóu, lǎosh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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