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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카 Apr 20. 2022

이번에는 태국어다

순도 백 퍼센트의 취미

몇 주 전부터 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고 했으나 어째 실력은 지지부진, 취미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가슴 아픈 중국어의 기억을 묻어두고 있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태국어 독학 첫걸음> 교재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사실 태국어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OTT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태국 드라마나 영화를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기에 태국에 막 도착했을 때의 수완나품 공항 속 대화들, BTS에서 역 이름을 안내하는 방송 속의 나긋나긋한 목소리,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들의 말들이 전부였다.


친근하지 않았던 태국어가 갑자기 마음 한편 자리 잡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태국 여행을 다시 가고 싶다는 오래된 열망, 혹은 몇 년 간 꾸준히 찾았던 태국에서 그간 차곡차곡 쌓인 좋은 기억들이 태국 사람들과의 소통에 대한 호기심으로까지 뻗치게 된 게 아닐까.


동그라미와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태국어 글씨는 글씨라기보다는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기에 만만치 않은 난도를 예상하게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배워보고 싶다는 도전 정신을 자극했다. 한국에서의 높은 국가 인지도와 관광지로서의 인기를 고려하면 언어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음' 수준인데, 실제로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이외로도 언급이 못 되는 변방으로 밀려난 비인기 외국어 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회화를 구사할 수 있다면 나는 다름 희소성 있는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듬더듬 구사하게 된다 한들, 신기한 눈길은 몇 차례 받을 수 있을지언정 이것이 어떠한 명예와 수입을 가져다줄 수는 없으므로 이는 어떠한 떡고물 없이 오로지 흥미에만 초점이 맞춰진 순도 백 퍼센트의 취미라고 볼 수 있다.


큰돈과 노력은 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저 주말 이틀 각각 한 시간 정도만 가볍게 스트레스받지 않으면서 하는 것이 태국어를 시작하면서 정한 혼자만의 약속이다. 태국어의 세계에 일단 살짝 발을 담그기 시작한 순간, 생경하고 신기한 '외워야 하는 것들'이 밀물처럼 잔뜩 밀려 들어왔다.




태국어의 자음과 모음 체계는 한글의 그것과는 굉장히 다르다. 중 / 고 / 저 세 가지로 분류된 자음은 장단음 / 장모음과 붙어 평성 / 1성 / 2성 / 3성 / 4성 총 다섯 가지 성조로 변화무쌍하게 발음되며, 자유분방한 모음의 위치는 또 어떻고! 태국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새삼스레 모음이 오른쪽에만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태국어의 모음은 오른쪽은 물론이고 왼쪽, 위, 아래에도 모음이 붙는다.



태국어는 주어와 술어의 순서도 다르고, 마침표도 띄어쓰기도 없기에 어디까지가 한 문장인지 구분이 어렵다. 사실 이런 어려움은 아직 체감하지 못했다. 자음과 모음 외우기 무한반복 지대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신기한 것은, 지렁이 모둠처럼 보였던 글씨 하나하나가 낱개의 어엿한 문자로서 점점 눈에 익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물론 읽을 수 있다고는 안 했다).

동글동글한 원 모양의 이름이 '후아'인데, 후아는 제멋대로 자라는 담쟁이넝쿨의 끝자락처럼 안쪽으로도 바깥쪽으로도 말려있곤 한다. 무슨 상관이냐고? 이것 하나로 철자가 달라진다. 몇 개 자음은 글자 모양에서 떠오르는 형상과 그 뜻이 바로 매치가 되기도 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닭의 모습인 꺼-까이 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는 어린이 같은 더-덱 ด, 의미 그대로 뱀처럼 생긴 응어-응우- ง 는 비교적 빨리 외웠지만, 아직도 많은 난관이 남았다.


순도 백 퍼센트의 취미라 못 박고 시작한 만큼, 열등감과 자괴감으로 얼룩졌던 중국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느슨한 목표를 잡고 공부를 시작하려 한다(어차피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나보다 잘한다고 비교하고 절망할 대상도 없지만).

3년이다. 이 기간 안에 여행지에서 현지인과 매우 간단한 수준의 스몰 토크를 할 수 있게 되고, 길가의 간판에 적힌 글씨를 읽을 수 있을 수준까지 도달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뤄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거창함은 모두 걷어낸 소박한 목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태국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글자들이 동글동글, 발음도 부드러워 된소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드센 어조가 아니기에 혀에 힘을 빼고 발음하기 좋다. 글로 읽기에도 입으로 말하기에도 뾰족하고 날카롭거나 예민한 면이 하나도 없다. 사바이 사바이, 쫓기는 것 없이 느긋하게 지냈던 태국에서의 내 모습처럼. 앞으로도 다름에서 느끼는 신기함과 새로움을 마음껏 즐기며 재미있는 공부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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