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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 Jul 25. 2020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처음도 완벽하고 싶었는데

첫 해외여행은 19살 때였다.

내 주위 대부분의 친구들은 계획적인 나와 달리 다분히 충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그 손을 뻗어 영향을 끼치곤 한다. 어쨌든 그 충동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S언니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히비, 우리 일본 갈래?"


평소와 다름없던 대화 중 뜬금없이 저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보통의 나라면 여기서 웃어넘기든가 이유부터 물어야 한다. 그런데 뭐가 되기는 될 모양이었는지 나는 평소처럼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며 타박을 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 좋지. 언제?"


자세한 내막은 결정을 하고 나서 들었다. 그 이야기의 앞으로 약 두어 달 뒤에, 한창 덕질 중이었던 아이돌의  오사카 콘서트가 있었다. 나는 그 투어의 콘서트를 이미 서울에서 한 번 다녀온 데다가 연예인을 따라 해외에 갈 정도로 담이 큰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미성년자에, 해외여행은 처음이었고, 해외 콘서트를 간다는 생각은 태어나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는 이상하게도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왜 그랬나 몰라. 나는 운명 같은 건 믿지 않는데 가끔 이렇게 그 존재가 미심쩍을 때가 있다.


이미 한 번 충동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두 번 못 하리라는 법은 없다. 나는 저가 항공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항공료로 꽤나 많은 돈을 썼다. 중간에 스케줄을 두 번이나 바꿨기 때문이다. 내게는 도쿄에서 유학 중이었던 친구 -이하 D- 가 있는데, 내가 오사카에 간다고 하자 D는 어떻게 일본에 오는데 자기를 안 보고 갈 수 있냐며 나를 들들 볶았다. 오사카도 가는데 도쿄를 못 갈까? 결국 나는 홀라당 넘어갔고, 2박 3일 예정이던 여행은 일주일로 확 늘어났다. S 언니와 K (역시나 언니에게 꼬임 당한 동생)는 3일 후 간사이 공항에서 김해 공항으로, 나는 도쿄 나리타 공항으로.


나는 미성년자에 해외여행이라고는 12살 때 다녀온 뉴질랜드 영어 캠프가 전부였으므로, 당연히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떼를 쓰다시피 해서 허락을 받아냈다. 해외 콘서트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하실 게 뻔하니 그냥 여행이라고 작은 거짓말을 했다. 사실과 아주 다른 건 아니었다. 콘서트 일정은 일주일 중 겨우 두 시간 반이고, 나머지는 다 여행이 맞으니까. 그 이후로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아마 아직 모르고 계실 거다. 이 글로 처음 알게 되실지도. 엄마 아빠,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허락까지 따냈겠다, 몸이 달은 나는 혼자 들떠서 열심히 여행을 준비했다. 직장에도 선전포고처럼 휴가를 냈다. 매일 밤마다 늦은 시간까지 일정을 짜느라 컴퓨터 화면으로 들어갈 듯이 고개를 박았다. 완벽하고 싶었다. 내 첫 일본 여행이라니! 일식과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소녀에게 로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단어다. 영화처럼 푸르고 청춘 내음 가득한 아름다운 여행이 하고 싶었다. S 언니와 K에게 열댓 개의 링크를 들이밀며 숙소를 결정하고, 교통 패스를 주문했다. 타베로그와 트위터, 네이버를 뒤져 후기를 비교해가며 방문할 맛집들을 선정했다. 구글맵 내 지도에 별이 다닥다닥 박혔다. 여행 준비는 내가 혼자 거의 다 했다. 스트레스가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덕택에 내 적성을 찾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후회는 없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여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청춘 내음 가득한 여행은 완전히 실패했다. J 언니가 여행 첫날 이후로 내내 몹시 아팠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소화했어야 할 일정들을 대부분 스킵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어쩔 수 없는 초행길이라 서툴었던 나는 예정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썼다. 아마 아르바이트로 저축했던 돈을 거의 다 써 버렸던 것 같다. 도쿄에서도, 길을 잃으면 안 된다는 압박에 주변 풍경보다는 지도를 들여다보느라 바빴다. D 없이 혼자 돌아다녔던 나리타 공항이며 하라주쿠는 지나친 긴장 때문에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좋았다. 매일 평범한 밥만 먹던 사람이 어쩌다 호텔 요리를 맛보고 나면 그게 잊히지 않는 법이다. 나는 그 일주일간의 엉망진창 여행 이후로, 무언가에 눈을 떠 버렸다.



어설프고 서툴렀던 여행만큼이나 엉망인 사진. 그때도 지금도 사진에는 소질이 없지만 적어도 전보단 지금이 낫다.



나는 열일곱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열여덟에 검정고시를 쳤으며 그 후 곧바로 수능을 준비하다가 또 공무원 시험으로 갈아탔다. 그 시험들을 준비하면서도 계속 갈팡질팡 했던 것 같다. 내가 이걸 하고 있어도 되나? 이게 맞는 길인가? 사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길이고, 나는 시간을 버리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대학도 공무원도 정말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싫은 것에 더 가까웠다. 고요 속에 억지로 앉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들을 쑤셔 넣는 것은 나와 상극이었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편인데 머리가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니 저절로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성장통의 기간 동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여기여야만 하나? 내가 꼭 여기에서, 한국에서 나와 맞지 않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나? 나는 더 좋은 무언가로 내 시간을 채우고 싶었다. 맞지 않는 공부 같은 것을 하면서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첫 일본은 그 '더 좋은 무언가'를 내게 줬던 것 같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 가서, 서툰 일본어로 길을 묻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가정식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내 마음에는 무언가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원래 이름이 아니라 '헤매다'라고 불러야 한다는 우메다의 미로 속을 뱅뱅 돌면서도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때 평생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거리를 두 다리로 헤매며 매일매일 낯선 것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 어린 날의 도서관 이후로 취향을 처음 발견한 짜릿한 순간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다녀온 곳을 하나하나 꼽자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다니기는 했다. 고향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너랑 만나려면 1년 전에는 약속을 잡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빠는 아빠의 역마살이 내게로 내려왔다고 했다. 그만큼 나는 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을 못 견뎌한다. 또 책이나 미디어에 자주 나오는 청춘 여행에는 로망이 있지만 해 보고 싶지는 않다. 적은 돈으로 많은 곳을 다니고, 숙소를 잡지 않고 떠나서 남의 집에서 자고, 얼마 되지 않는 예산을 아끼기 위해 싼 것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 짓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나는 도미토리의 공동욕실을 싫어하고, 오픈된 곳에서는 잘 수 없으며 아무리 못 해도 이틀에 한 끼 정도는 괜찮은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세계를 걷기에는 불리한 조건이다.

 

아무리 불리한 조건에 과정이 서툴고 엉망이더라도 좋아하는 풍광을 보며 맛있는 것을 먹으면 안 좋은 생각은 하려야 할 수가 없다. 그 순간순간들이 나중에 여행을 되돌아보았을 때 모자랐던 부분들을 미화시키는 것 같다. 고생만 죽어라 한 오사카 첫 여행도 그렇다. 가보고 싶은 곳을 반도 가보지 못했고 이것만큼은 꼭 먹어야지 했던 것들도 먹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사카를 다녀온 뒤 내게 남은 것은 통통 튀고 반짝거리는 느낌들이었다. 그것들이 원동력이 되어 나를 다음 여행으로, 또 그다음 여행으로 이끌었다.


첫 여행 이후로 무언가를 처음 시도하는 데에 있어 두려움이 훨씬 덜 해졌다. 실수하고 헤매며 땡볕에 몇 시간을 내버려도 결국엔 좋은 순간들이 남는다는 걸 알게 되어서다. 여행이 아니라 다른 거라도 똑같겠지, 하며 부딪쳐 보면 역시나 시행착오 끝에 행복이 있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고행을 미화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게 나에겐 가장 큰 진리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또다시 무언가 시도하려다 문득 두려움이 고개를 들면, 나는 오사카를 떠올리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씩 되뇌어본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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