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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 Jul 25. 2020

호주,

이제는 애증이 되어버린  그 이름

호주에 온 지는 이제 3년이 다 되어간다. 1년짜리 워킹 홀리데이로 처음 발을 딛었을 때, 이 나라는 마치 나를 반기기라도 하듯 내가 원하던 것들을 모두 품에 안겨 주었다. 한 달 만에 400여만 원을 모아 본 적도 있고, 요리를 좋아하는 내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던 흥미로운 식재료들과 휴일 오전의 여유 가득한 브런치는 어린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외국에 나가면 제일 믿어선 안 되는 게 한국 사람들이라던 말과는 달리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그들과 정신없이 밤을 지새우며 놀아보기도 하고, 무작정 버스를 잡아타고 근처 해변으로 가 하루 종일 볕을 쬐기도 했다. 모두 한국에서는 해보지 못 한 경험들이었다. 나는 고작 반년만에 넓으면서도 좁은 섬나라 호주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는 딱 1년만 있다 갈 생각이었는데, 이게 웬걸, 집에 가기가 싫어졌다. 영주권을 따고 싶다는 말을 부모님께 하기까지 수백수만 번을 망설였다. 도중에 포기한 경력이라면 이미 많았다. 말이 좋아 진로를 바꾼 거지, 아무리 내 인생이라도 이 시험에서 저 시험으로 갈아탈 때마다 부모님 속이 얼마나 썩어 들어갔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이가 어린 편인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스물두 살이면 서른 살 전에는 영주권을 딸 수도 있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독립 기술 이민부터 스폰서 비자까지, 이민 방법에 대해 발로 뛰며 공부한 뒤에 조심스레 부모님께 말을 꺼냈다.


"엄마, 나 영주권 따고 싶어."


"어떻게 딸 건데?"


부모님은 생각보단 쉽게 허락해주셨다. 물론 속이 어떠셨을 지야 나는 알 수 없지만, 이리저리 갈팡질팡 하는 딸의 행보에 적응이라도 하신 듯했다. 대신 계획을 철저히 세우라고 하셨다. 문제없었다. 그거야 내 전공이니까. 곧바로 유학원을 알아보고, 주변인들에게 학교 추천을 받으며 학생 비자를 준비했다. 워킹 홀리데이 동안 죽어라 일해 모은 돈이 순식간에 휙휙 빠져나갔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빠는 사실 내가 호주로 가겠다 할 때부터 당신의 딸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직감하셨다고 한다. 그제야 나는 아빠가 워킹 홀리데이를 그토록 반대한 이유를 이해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그만두겠다 할 때도, 수능 준비를 하다 공무원 준비로 갈아탔을 때도,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서울이며 일본을 들쑤시고 돌아다닐 때도 제 인생 제가 책임지는 거라며 쿨하게 넘어갔던 아빠는 그냥 내가 엄마 아빠와 떨어져 다른 나라로 가 버리는 게 싫은 거였다. 조금 눈물이 날 뻔했다.



호주는 캐나다와 같이 이민자 정책이 가장 열려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민을 준비하는 내 나잇대 한국인들은 꽤 많다. 속된 말로 돈만 주면 그냥 받아줬다던 옛날과 달리 최근엔 그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곳에 살고 싶어 한다. 그중엔 호주에 매력을 느껴 '여기서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냥 한국보단 나아서, 한국에 살기 싫어서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20 대 80 정도의 비율이다. 호주가 좋긴 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살기 싫어! 하는 정도는 아니고, 한국에는 살기 싫다. 쉴 틈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한국의 생활은 나와 맞지 않았다. 한국에 살 땐 지금과 달리 집도 있고, 내 모국어로 말할 수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날것의 음식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붕 떠 있는 것 같은 지금의 호주 생활이 더 좋다.


물론,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 힘든 일들도 있었다. 몸을 갈아가며 마음 바쳐 일했던 가게에서 사장님과 크게 싸우고 억울하게 그만둔 적도 있고, 팔자에도 없던 허리 디스크가 생겨 석 달간 병원을 다니기도 했다. 엉망진창인 연애도 한몫을 했다. 호주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곳이 한국이 아닌 호주라는 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호주가 미워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밤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 공황 발작으로 길거리에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었을 때도 그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털끝만치도 생기지 않았다. 이상했다.


나는 좋은 일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행복해하며 곧장 뒤로 넘겨버리는 성격이라 - 이게 나쁜 일에도 적용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 오랫동안 곱씹게 되는 나쁜 일들에게서 받는 영향이 더 컸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 분명 이를 악물고 힘든 폭풍을 견뎌냈는데 지치기는커녕 오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보자. 내가 어디서 포기하나 보자. 죽어도 여긴 아니야. 이걸 탓이라고 해야 할지 덕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가치관부터 생각하는 방식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전과는 퍽 다른 사람이 되었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래도 전보다 조금 발전한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나는 이게 재밌고 즐거웠다. 웃을 일이 생겨도 울 일이 생겨도 내가 계속 변한다는 게 신기했다.



얼마 전, J와 함께 파트너 비자를 준비하면서 'Statement of relationship'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다. 대충 우리가 어떻게 만났고, 왜 함께 하기로 결정을 했는지에 대해 쓰는 공적인 러브 스토리인데, 마지막 문단에 계속 넣었다 뺐다 하며 고민을 반복했던 문장이 있다.


호주는 우리를 계속 변하게 하고, 끊임없이 꿈꾸게 한다.


결국 이 문장은 문서의 성격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 넣지 않았지만, 저게 바로 내가 호주에 살고 싶은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나는 아직 어리고 생각이 격변하던 나이에 호주로 왔기 때문에 어쩌면 한국에 있었어도 같은 변화를 경험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호주 만은 못 했을 거다. 그냥 그런 것 같다. 호주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이번 코로나 판데믹 때 호주 총리는 유학생들에게 각자의 나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다. 한국 정부에서 각 가정에 인원수만큼 지급했다는 재난 지원금은 우리 집엔 내가 해외에 있다는 이유로 세 명 분만 나왔다. 솔직히 조금 서러웠다. 호주에서 호주 국적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서러운 일들의 연속이다. 그래도 버텨보기로 했다. 이 곳은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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