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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 Jul 25. 2020

남들처럼만 살고 싶어서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유난히 힘들었던 어느 날이었다. 워킹 홀리데이에서 학생 비자로 바꾸는 과정과 일자리를 옮기는 때가 겹쳐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우며 중얼거렸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아스트랄하지. 좀 조금만, 진짜 잠시만이라도 평화로우면 안 되나.


그때 함께 살고 있던 5년 지기 친구는 옆에서 내 말을 듣고 낄낄대며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맞아, 내가 너처럼 평화롭지 못하게 사는 사람은 처음 봐.

근데 그래서 너랑 있으면 재밌어. 하루도 안 심심하고 지루할 일이 없거든.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친구를 째려보다가 이내 함께 웃었다. 그 말이 얄미우면서 웃겼다. 당사자는 힘들어서 죽으려고 하는데, 옆에서 보면 재밌다니.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거구나. 그렇게 따라 웃고 나서도 그날 밤엔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다. 쉴 틈 없이 휙휙 돌아가는 상황이 조금 벅차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 생각한 것 같다. 남들처럼만 살고 싶다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자의식 과잉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거치는 성장 단계라지만 나는 그게 좀 더 오래갔던 것 같다. 자꾸 내게 너는 보통이 아니라고 했던 부모님 탓도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아빠는 그냥 내가 아빠 딸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 엄마는 항상 내가 4살 때 이미 한글을 떼서 책을 읽었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했다. 영어 공부를 좋아했고, 집에 쌓여있던 책들은 이미 초등학생 때 다 읽었다. 저학년 때는 집에 있는 책이 모자라서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 하루 종일 처박혀 있다가 20권 정도를 더 빌려왔다. 주에 한 번 3권씩 책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도 구독했다. 온 사방이 책이고 수업 시간 내내 책 얘기만 하는 논술 학원은 어린 시절의 내가 가장 편안하게 여기던 장소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책을 좋아했으니 부모님이 나를 언어 영재 수준으로 여기던 것도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쳤던 영재원 입학시험은 수학과 과학 부분에서 장렬하게 실패했지만, 시 영어 대회에서는 척하고 입상해서 2주간 뉴질랜드를 다녀왔다. 그때 꿈은 외교관 아니면 작가였다. 언어와 글을 가까이하는 삶이 살고 싶었다. 둘 다 내가 잘하는 분야라 문제없을 것 같았다. 나는 특별히 똑똑한 사람이니까.


그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냥 동네의 중학교를 갔음에도 날고 기는 아이들이 많았다. 외고며 과학고, 민사고가 목표인 친구들도 있었고 벌써부터 대학 입시 준비를 하며 한 길만 죽 파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때 즈음부터 디자인을 하고 싶어 했다. 탐탁지 않아하시는 부모님을 졸라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곳엔 완전히 천재들만 있었다. 한국의 교육 환경 상 예체능을 전공으로 삼는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하는 게 대부분이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들은 내가 엄두도 못 낼 그림을 손쉽게 척척 그려냈다. 비대했던 내 자의식이 작아지는 소리가 날마다 들렸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자퇴를 했다. 처음엔 행복했다. 다시 조금 특별해진 기분이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너는 집에 있어서 좋겠다고 카톡을 보내면 가슴 한쪽이 짜릿했다. 지긋지긋한 학교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점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압박이 나를 짓눌렀다. 이대로 멈춰 있으면 안 된다는, 뭐라도 해서 이 '조금 다른 길'을 계속 가야만 한다는.


처음엔 영국이나 미국의 패션 스쿨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드레스 디자인은 재미있었지만 나보다 훨씬 잘하는 '진짜 천재' 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학비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그 뒤엔 1년 일찍 대학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대학까지 가서 더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없었다. 그다음은 최연소 공무원을 노렸다. 공시생 생활이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지만 그 지루해 보이는 일을 평생 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이리저리 휙휙 바꾸던 나는 중간에 우뚝 멈춰 섰다. 길을 잃은 것이다.


조금 더 독특하고, 조금 더 멋있고, 조금 더 잘 나가는 인생. 사실 그런 게 뭔지는 하나도 모르면서. 알지도 못 하는 인생을 살아보려다 실패한 뒤, 다시 갈피를 잡고 마침내 호주에 오기까지는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호주에서의 나는 굳이 이런저런 시도를 하지 않아도 꽤 독특했다. 나와 비슷한 나잇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게다가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주변 상황이 시트콤처럼 흘러갔다. 그 흐름에 편승해하고 싶은 건 그냥 앞 뒤 따지지 않고 다 해 봤다. 그때의 나는 내가 원하던 독특하고 멋있는 인생을 조금 맛보았다.


그러다 어느샌가 마음 한 구석에 생각 하나가 꾸물꾸물 고개를 들었다. 꼭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나? 그냥 대충 비슷하게 살면 안 될까. 이제 좀 피곤한데. 여전히 남다르고 독특한 길을 가는 사람들을 동경했지만 나와 같지는 않아 보였다. 게다가 평생 남들과 다르게 살려면 나는 내내 긴장하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아차 하면 똑같아질 것 같아서.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건 남들 눈에도 예쁘고, 내 눈에 미우면 남들 눈에도 미웠다. 나는 사실 남들과 그리 크게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나만 부정하다가 늦게 깨닫고 말았다.


내가 과거의 나에게 내민 타협 제안을 나는 싫은 척 느리게 받아들였다. 그래, 좀 비슷하게 살면 어때. 나만 좋으면 됐지. 남들하고 좀 똑같아 보여도 내가 행복하면 된 거고, 이게 좀 흔한 것 같아도 나만 즐거우면 된 거 아니냐. 어찌 보면 자기 합리화에 가까운 이 타협은 나를 한층 자유롭게 만들었다. 전처럼 하고 싶은 건 다 했다. 조금 달라진 건, 뻔해 보일까 봐 안 하던 것들도 가리지 않고 다 하게 됐다는 것. 남들이 다 하고 있는 유행 타는 것이라도 내 눈에 좋아 보이면 그냥 했다. 그러니까 행복했다. 즐거웠다. 마음이 편해지니 매일 하던 걱정이며 생각도 조금 줄어들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이 되고 나니 이상하게 주변에서 쟤는 진짜 독특하게 산다는 말이 종종 들렸다.



최근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남들처럼만 살자. 우리 좀 평화롭게 살자. 나는 툭하면 J에게 말하고는 한다. 남들만큼만 일 하고, 남들만큼만 벌어서, 남들만큼만 소비하며 살자고. 최근의 나는 일주일에 사흘만 출근하며 전에 비하면 용돈 정도밖에 안 되는 돈을 번다. 일하는 곳은 원래 단골이던 카페로, 시급은 그렇게 높지 않다. 둘 중 한 사람만 돈을 제대로 벌다 보니 솔직히 통장 잔고가 여유롭진 않지만 그래도 좋다.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쓸 시간도 생겼고, 전처럼 주기적으로 우울하거나 과로로 몸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나는 이 정도에 만족한다. J는 내가 행복해하니까 만족하는 것 같다.


꿈은 이제 크지 않다. 그냥 언젠가는 영주권을 따서, 집 앞에 맛있는 카페와 빵집이 있는 조용한 동네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J와 함께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울 것이다. 두 마리 씩이면 더할 나위 없다. 이름도 미리 지어놨다. 첫째 강아지는 허니, 둘째 강아지는 버터, J는 그럼 고양이 이름을 칩으로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좀 생각을 해 봐야 할 부분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지금처럼 평화롭게, 남들처럼만. 그게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길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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