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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비 Jul 25. 2020

너를 만나

비혼 주의자의 결혼

가수 폴킴의 '너를 만나'. 한동안 나와 K 언니가 좋아했었던 노래다. 노래방의 단골 선곡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재생 목록에도 두세 번 들어가는 편애를 받기도 했으며 나보다 더 이 노래에 미쳐있었던 K 언니는 하루 종일 이 노래를 반복 재생하기도 했다. 카톡 중에 언니가 텍스트로 노래를 불렀던 적도 있는데 그 채팅 화면은 캡처로 내 인스타 스토리에 박제되었다.

내가 이 노래를 좋아했던 이유는, 원래 폴킴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가사와 뮤비가 무척이나 절절하기 때문이다. 너를 만나 참 행복했다고 다정히 읊조리는 가사는 모두 과거형으로 쓰여 있어 언뜻 들으면 이별 노래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노래는 절대 이별 노래가 아니다. 뮤직 비디오에 나오는 두 남녀는 행복한 연애 생활을 하다 마지막에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카메라를 향해 해맑게 웃어보인다. 그러니까 '너를 만나'는 이별 노래가 아니라, 연애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그다음 단계인 결혼으로 나아가기 위한 따뜻한 고백의 노래이다.


나는 파트너 J와 얼마 전 호주에서 혼인 신고를 했다.  내 비자를 J에게 묶기 위해서였다. 호주에는 파트너 비자라는 게 있는데, 두 사람이 따로따로 비자를 발급받을 필요 없이 한 사람만 비자를 받으면 그의 파트너는 그와 같은 조건으로 호주에 머무를 수 있다. 파트너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밟아야 할 절차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디팩토(De Facto). 우리나라로 치면 사실혼 관계 같은 것인데, 함께 산 지 1년이 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 그 자료들은 공동 명의 통장부터 지인들의 증언 및 사진까지 그 양이 꽤 많다. 두 번째는 결혼이다. 이건 다른 게 필요하지 않다. 법무사를 통해 혼인 신고를 하거나 직접 BDM(Births, Deaths & Marriage)이라는 호주 관청에 가서 하면 된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여기서 혼인 신고를 하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싱글이기 때문에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이 길을 선택하고는 한다.


유학원에서는 결혼이 아닌 디팩토를 추천했다. 결혼을 할 경우 만약 나중에 마음이 바뀌었을 때 헤어지려면 기본 1-2년이 걸린다는 게 이유였다. J는 내 소개로 연결됐기 때문이었는지 원장님은 이 말을 내게만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저희는 동거 기간이 1년이 안 되는데요. 그와 동시에 원장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기는 했다. 그 일을 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유학생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보셨을 것이며, J를 만난 지 아직 1년이 안 됐다는 내가 혹시라도 그 고행길을 밟게 될까 걱정하는 언니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괜찮다고 몇 번을 말씀드린 뒤 진행해달라 부탁드렸다. 비자 신청비부터 법무사 비용까지 약 2000불에 달하는 돈이 나갔다. 우리는 그렇게 결혼했다. 웩.



나는 비혼 주의자다. 이건 끊임없이 변하는 내 인생에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몇 안 되는 가치관 중 하나다. J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둘 다 결혼이나 가족, 육아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억만 광년 정도 먼 사람들이다. 비자를 묶는 게 어떠냐는 말은 J가 먼저 꺼냈다. 학교를 다니며 일을 하고 과제도 하면서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집안일까지 거의 도맡아 하는 내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솔직히 말하면,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제가 날 대신해 지긋지긋한 학교와 과제 그리고 이후의 과정까지 다 밟아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그즈음의 나는 번아웃으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나를 망설이게 만드는 건 딱 하나, 그 제안을 듣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고 있는 나의 신념뿐이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 계획은 확고했다. 26살에 결혼해서 28살에는 첫 아이를 낳기. 최대한 일찍 결혼하고 싶었다. 웨딩드레스나 아름다운 결혼식에도 로망이 있었다. 그때는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었으니 그게 당연했다. 생각이 바뀐 건 스무 살 직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에 깊게 뿌리내린 가부장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때맞춰 트위터에서는 페미니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런저런 책과 뉴스들을 접하면서 나는 결혼의 환상과 점점 멀어져 갔다. 우리 가족과도 퍼스널 스페이스를 외치며 거리를 두는 내가 남편의 가족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 우리 엄마 아빠한테도 효도하는 게 아직 어렵게 느껴지는데 대리 효도를 할 수 있는가? 놉. 알고 보니 나는 아기와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데다 내 멘탈 하나 챙기기에도 벅찬 사람이었다. 아이를 낳아 잘 키울 자신이 있는가? 절대로 아니. 맞벌이를 하며 두 사람분의 가사 노동을 다 챙길 수 있는가? 미쳤나 봐 진짜. 


그러니까, 내가 싫어하게 된 건 한국식 결혼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게 아닌 가족과 가족의 결합. 결혼=임신의 절대적 공식이 존재하며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가부장제 탓에 도련님이니 아가씨 같은 호칭이 있는 한국의 결혼.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 왜 당연히 아빠의 성을 물려받는지에 대해서는 그나마 고민을 덜 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 것 같다. 그 뒤로부터 나는 갑자기 변해버린 딸을 설득하려 노력하는 엄마와 지지부진한 말다툼을 가끔 했다. 언젠가는 너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을 할 거고... 아니 안 한다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 애도 낳을 수도 있고... 아 죽어도 안 한다니까요.


J와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 뒤에도 나는 하루에 몇 번씩 그 결정을 번복하고 싶었다. J와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J가 평생 내 곁에 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 호주에 살고 싶어 하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 한국식 제도에 순응하게 될까 봐 무섭기도 했다. J가 자진해서 고생을 제가 하겠다 하는 것임에도 나는 혼인신고 직전까지 뻑 하면 나 결혼 안 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럼 J는 또 쩔쩔매며 나를 달랬다. 너도 비혼 주의자면서 왜 나랑은 결혼을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도 자주 했다. 대답은 항상 같았다. 너니까. 히비니까. 어차피 계속 같이 있을 건데 이거 하나 한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이 또 싱숭생숭했다. 그런 말은 J가 남자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남자들은 결혼으로 손해 보는 게 별로 없으니까. J가 자란 환경도 우리 집 못지않은 가부장제의 굵은 가지라서, 그에 따른 영향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 나는 K 언니에게 자주 하소연했다. 차라리 J가 여자면 좀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아. 어차피 나는 양성애자니까 동성 결혼이 한국 결혼보다 나아.


J의 집이 미디어에 나오는 것 같은 지독한 시댁은 아니다. 애초에 J는 가족과 데면데면하고, 연락을 자주 하지도 않는다. 사귀고 나서 한국의 가족과 전화를 하는 것을 본 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다. 그 점은 우리가 결혼에 대해 논의할 때 꽤나 큰 강점으로 작용했다. 며느리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는 오직 그것 하나를 단단히 약속받았다. J의 가족과 가족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J도 제 가족에게 하는 게 없으니까. 만약 언젠가 J가 마음이 바뀌어 가족과 사이가 좋아지면, 그때는 나도 그 사람들과 조금 가까워질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J가 안 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걸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는데, J의 어머니가 우리가 사귀는 것을 알고 J를 닦달해 내 연락처를 받아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J는 그때 학생 비자를 진행하고 있었고 J의 어머니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싶어 하셨다. 내가 J의 카톡 계정으로 대신 설명을 하기도 했고 기어코 내게 카톡을 하신 그분에게 장문의 카톡으로 찬찬히 상황을 설명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냥 나와 통화하기를 원하신 거였다. 어느 날 밤 J에게 전화를 하신 그분은 나와 통화를 하시고 나서야 연락을 그만두셨다. 통화 내용의 요약은 이랬다. J가 연락도 잘 안 하고 말도 없고, 그러니 네가 좀 해라.


물론 나는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가족과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락을 자주 하지도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통화나 메시지로 생존 신고를 하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전화를 하는 정도다. 그런 내가 굳이 여자 친구라는 이유로 그 집에 꼬박꼬박 연락을 하고 근황을 알릴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J의 어머니로부터 약 서른 장의 사진이 메시지로 날아왔다. 중학생 수준의 영어 문제들이었다. 코멘트는 이랬다. 히비야, 이거 좀 풀어서 보내줘라. 사진에 적힌 이름은 J의 형이었다. 나는 당연히 뒤집어졌다. 엄청나게 화를 냈고, 본인도 화가 났지만 내가 너무 화를 내서 당황한 J는 또 쩔쩔맸다. 몇 분 후 겨우 진정한 나는 우선 문제를 풀어 J의 카톡을 통해 보냈다. 그리고 J에게 으름장을 놨다. 다시는 나한테 이런 연락 오게 하지 마라. 이게 마지막이다. 연락도 가능하면 안 받고 싶다. J는 알겠다고 했고, 그 뒤로 나는 J의 가족에게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때 J와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 사귀는 사이인 데다 반년 정도밖에 안 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런 앞 뒤 설명 없는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았는데 결혼을 하고서는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주변인들의 말을 들으면 J의 형은 결혼을 했는데, 그 아내 분에게 그분은 그다지 나쁜 시어머니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 내게 날아온 그 메시지도 괜찮은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아니었다. 나는 그런 의무를 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주변에서 우리를 부부로 부르거나 하면 진저리를 친다. 정말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다. 얼마 전 있었던 J의 직장 회식 자리에서 나를 부르길래 따라갔다가 형수님이니 제수씨니 하는 호칭을 듣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도 했다. 우리 엄마가 J를 J서방이라고 불렀을 땐 왁 하고 소리를 지르며 제발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우리는 그냥 연인이고, 이건 필요에 의한 법적 절차일 뿐이라고 결혼에 대한 것들을 부정한다. 덕분에 우리 엄마는 처음 J와 통화할 때 이렇게 말했다. J야, 히비와 특별한 친구 사이가 된 것을 축하한다. 나는 옆에서 듣다 웃겨서 뒤집어질 뻔했다. 그리고 엄마가 조금 더 좋아졌다.


결혼을 하는 여자들에 대해 가부장제의 부역자니 하는 말로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선택이고, 그들의 인생에 있어 결혼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결혼으로 묶이지 않은 동거인들을 가족으로 보지 않는 한국에서는 결혼이 가장 합리적 선택이 맞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비상시 서로에게 보호자가 되어줄 수도 없고, 보험이니 세금이니 하는 것들의 혜택을 받을 수도 없으니까. 다만 나는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고, 지금 한국에 살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한국에 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비혼을 선택했다. 아마 J를 한국에서 만났다면, 그래서 지금의 관계에까지 도달했다면 여기서 한 혼인신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딜레마를 겪으며 오랫동안 괴로워했을 것이다.


나는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비혼 주의자이다. 나와 J는 한국에서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 결혼식도, 혼인 신고도 없을 것이다. 호주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자를 묶기 위해 한 혼인 신고가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우리는 아마 쭉 함께 살겠지만, 가족 친지를 모두 모아놓고 앞으로 잘 살겠습니다 하는 선언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으니까. 서로를 남편이나 아내로 칭하지 않아도 되고, 명절에 서로의 가족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우리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다. 우리의 의무는 오직 서로에게만 존재한다. 때문에 나는 J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항상 파트너라고 소개한다. 남편도 남자 친구도 아닌 파트너. 우리에게 있어 변한 것은 서랍 안에 들어가 있는 Marriage certificate라는 짐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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