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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Mona Jul 24. 2023

새로운 노트

참으로 오랜만에 나를 위한 물건을 샀다. 늘 이만 원 언저리의 배달 음식으로 주는 공허한 도파민 보상이 다였는데, 예상되는 퇴직금과 이직할 곳에서 측정해 준 가격표를 받고 갑작스레 둑이 터지듯 콸콸 흘러들어오는 여유에 마음이 올라탔다. 몇 년을 망설이던 태블릿 PC와 각인까지 새긴 부속품을 손에 쥐었다.

무슨 놈의 기기가 본체보다 주변에 두를 액세서리가 훨씬 많다. 효율적인 소비를 좋아하는 대신 가급적이면 새것을 선호해서 좀처럼 당근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데, 엄마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쉽게들 중고거래를 하는 걸 보고 괜히 호기심과 용기가 났다. 사실 누군지 모를 사람을 기다리고 멋쩍어하며 상품을 확인하는 게 조금 어색해서 미룬 것 같기도 하다.


만 5년을 쓴 오래된 랩탑 대신 들고 다닐 거라는 명목으로 샀으니, 키보드도 필요했다. 좋아하는 키감을 갖추자니 가격이 제법 비싸 고민하다 찾은 반값의 매물. 요 며칠 살피던 시세와 비슷한데 슬리브 케이스까지 준다고 하니 나의 다른 의식이 말릴 새도 없이 약속을 잡았다. 친절의 척도라고들 하는 온도도 온돌방처럼 뜨거웠기 때문에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걱정을 눌렀다. ‘어떻게 돈을 줘야 하나’, ‘현금을 주면 나중에 혹시라도 물건이 잘못 됐을 때 구제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자잘한 걱정을 하는 새 흐르는 땀과 함께 그가 사는 집 근처에 도착했다. 그곳으로 가는 조건으로 3천 원을 빼주기로 했고, 버스를 환승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친절한 말투에 가졌던 선입견과 반대의 성별의 사람이 다가왔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머쓱하게 테스트를 요청하는 내가 살펴볼 동안 자연스럽게 케이스를 들어주고, 송금을 하려 부산스러운 내 손에서 키보드를 가져가 케이스에 담아 건네는 그를 보며 아주 간만에 모양새 깔끔한 친절을 맛본 기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노을은 서쪽에 사는 걸 새삼 좋아하게 한다.


집에 오자마자 키보드를 페어링하고 몇 자 적어본다. 사려고 했던 저가 상품보단 고작 2만 원 비싸지만 1/3쯤 가볍고 언제나 좋아하던 촉감이다. 쓰기를, 느끼기를 멈춘 내가 새로 산 큼직하고 비싼 노트에는 어떤 날들이 다시 새겨질까. 마무리할 곳과 새로이 만날 곳,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만큼 더욱 채워질 에너지. 스스로에게 걱정보다는 기대와 축하로 채워주라는 말을 해준다. 뒤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저 나가면 그만이다. 나아가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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