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이상 획을 토해내지 않다 보면 모월 모일 밤이 대신 체하기 마련이다. 이리저리 누워봐도 침대보와 잠옷은 자꾸 겉돌기만 하고 손가락 사이에 땀이 스민다. 사람은 더 이상 헤엄칠 일이 없어 갈퀴가 퇴화했다지만 흔적은 남아 있는 것처럼, 밤과 아침을 이었던 글들은 잊지도 않고 찾아와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고 어깨를 잡아 흔든다. 처서가 진작에 지났다고, 귀뚜라미는 이미 울기 시작했단다. 모두가 잠이 든 시간, 가로등마다 쏟아지는 지난 시간들이 결국 술을 사오게 한다. 집 근처 역까지 쫓아온 흉흉한 소식들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녹진해진 비싼 초콜릿을 내일까지 기다리게 하기엔 아쉽다. 내일 밤은 억지로 일찍 잠에 들어야 하니까, 오늘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로 한다. 콜론 앞 숫자가 다시 한 자리로 바뀌었다.
위스키는 영 취향이 아니다. 찬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니트나 스트레이트의 음용 방식이 내키지가 않는다. 온 더 락과 하이볼은 왠지 술값이 아깝지만, 결국 그렇게 소진한다. 부정적인 시선은 알은 체가 심했던 한 녀석이 아니꼬와 허영심에 사본 글렌피딕의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 진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꼭 울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랑과 흔적이 비슷하다. 한참 전에, 아주 찰나를 만났을 뿐인데 오래 욱신하고 쓸데 없이 체온이 올라간다.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다. 정수리께까지 만땅으로 마셔도 갈지 자를 그리며 집에만 잘 돌아가는 내가 길을 잃고 싶게 한다.
그래도 오늘 사온 조니워커는 제법 괜찮다. 어떨지 몰라 작은 보틀을 내미는 내게 이걸로 마시면 너무 금방이지 않냐는 편의점 직원분의 너스레에 멋쩍었다. 쇼트브레드 비스킷과 마카다미아 넛, 헤이즐넛 프랄린이 들어있다는 초콜릿을 베어 물고 술을 살짝 머금는다. 넘어가는 술을 붙잡고 우물우물 같이 씹어보기도 한다. 쌉쌀한 술과 달큰한 초콜릿이 섞여 색다른 맛을 낸다. 진정한 페어링이란 이렇게 뒤섞이는 것이라는데, 밥 위에 반찬의 흔적이 섞이는 것도 싫어하던 내게는 생경할 뿐이다.
얼마 전 썼던 짧은 문장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건 괴롭다. 매일을 함께 뒤엉키던 이들을 내 살인지 네 살인지 구분할 수 없어 그냥 무턱대고 잘라내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 실컷 혼자가 좋다고 해놓고 왜 잠을 설치는지 모를 일이다. 알고 보면 제일 다정한 사람이라는 말은 왠지 지는 기분이다. 나는 주고 싶다. 아마 받고 싶은 것이겠지. 어느 정도 이상 울지 않다 보면 모월 모일 밤이 대신 체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