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나와 소설 두 편으로 살펴본 SF 속 다중 우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소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통 SF라고 하면 Science Fiction을 떠올리겠지만, 여기서는 Speculative Fiction(사변 소설)으로 정의한 뒤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사실 장르 안에서도 SF를 사변 소설로 확장해서 보는 시각이 더욱 우세할 것 같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speculative fiction이란 대충 "현실이 아닌 다른 배경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아우르는 소설 장르"인데, 나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을 사변 소설은 가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사 속 인물에게 현실을 아득히 초월하는 조건을 부여하는, 일종의 사고 실험과도 비슷하다.
가벼운 예를 들어 보자.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 존재할 수 없음은 익히 증명된 사실이다(일반적으로는 그러하다). 그러나 만약 타임머신이 존재하여, 비극적 사건을 겪은 어떤 이가 과거의 분기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무슨 이유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선택은 그 사람의 인생과 전체 작품의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사실상 SF의 내러티브를 이루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벌어진' 상황 속의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지, 상황이 발생한 개연적 경위를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진정 개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 작가라면 소설이 아닌 논문이 걸맞지 않을까?
따라서 다중 우주나 평행 우주처럼 (정확한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지금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내러티브는 SF의 핵심 주제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일상적 차원에서 우리— 즉 현실의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4차원의 축에 매여 '지금‘ '여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꿈꿔 보는 것이다. 만약 선택의 순간마다 무한히 분기하는 우주들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면, 그리하여 지겨운 이 삶 바깥의 '나'를 목격할 수 있다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테드 창의 단편 소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한나 렌의 단편 소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바로 이 점에서 교집합을 갖는다.
세 작품은 다중 우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나 세부적 방향성은 엇갈렸다 모이기를 반복한다. 우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1부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주인공 에블린이 그간 못박혔던 지난한 삶을 조명한다. 그렇게 인생에 시달려 온 그녀는 알파버스의 사명에 휩쓸리며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능성을 목격해 버린다. 2부에서는 에블린이 그 모든 세계를 헤매면서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혹은 돌아가는 것이 맞긴 한지 답을 추구한다. 영화는 에블린의 생애가 실패로 얼룩졌던 만큼 그녀가 남들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마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무엇이든 할 수도 될 수도 있기에 삼천세계 중에서도 ‘이’ 에블린의 선택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찾아갈 것인가? 혹은 모든 것이 가능하면 결국 모든 것이 동등하게 무의미할 뿐임을 깨닫고 허무로 흘러들 것인가?
이 영화의 무수한 평행 우주 중에서도 나는 '라따구리' 유니버스를 가장 좋아한다. 해당 우주 속 에블린은 삶에 질식하는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동료 요리사 채드를 몰래 도와주던 너구리를 고발한다(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아주 진지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잡혀가는 너구리를 함께 쫓아가고, 채드가 지친 순간 에블린이 자신의 어깨에 채드를 태우고 다시 달려갈 때 관객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로 그 절박한 질주를 관전하게 된다. 그건 지금 자신에게 소중한 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다. 우스꽝스럽고 엉망일지라도 지금껏 그 세계에서 누적해 온 시간들을 놓지 않겠다는, 계속해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에블린은 딸 조이에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랑 여기 있고 싶어"라고 선언하나, 사실 영화는 그 반대의 인과 역시 암시하고 있다. 소중한 순간들이 있어 에블린이 수많은 세계 중에서도 여기를 선택했듯 사람들은 여기서 살아가기 위해 모자 속의 너구리를 있는 힘껏 쫓아가는 것이다. 웨이먼드가 생존하기 위해 다정함과 순진함을 체화한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언제나 삶이 선행한다. 우리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 지나온 시간을 붙들어야 한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역시 다중 우주를 동원하여 '현재'의 의미를 모색하나, 이 소설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거기 수반하는 윤리적 책임에 좀 더 집중한다. 작중 사람들은 양자 프리즘을 통해, 그 프리즘이 작동되는 순간 분기된 건너편의 우주와 소통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은 말 그대로 현실적인 문제로 작용한다. 내 선택은 저편의 내가 한 선택보다 우월한가, 혹은 열등한가? 내가 저지른 잘못이 저편의 내가 한 행위로써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의 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작중의 '프리즘 중독자 치료 모임'은 전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매분 매초 선택에 직면해야 하는 인간에게, 다른 세계를 훔쳐 보고 싶은 욕망이란 자유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현기증과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가능성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낼 수 있는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모든' 선택들과 거기서 파생된 모든 삶이 각자의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면, 이 작품은 '현재'의 선택은 과거의 '나'가 누적해 온 선택의 연장선에 있음을 짚어 낸다. 길에서 주인 없는 지갑을 주웠을 때, 열 번 중 아홉 번은 주인에게 돌려주며 살아 온 사람에게 같은 상황에서의 열 번째 선택은 그닥 중요하지 않을 테다. 한 사람의 선택과 그것이 삶에 일으키는 파장이란 결국 그 사람이 인생 내내 견지한 삶의 태도 안에서 벌어지는 까닭이다.
이러한 원리는 현재→미래 방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더 나은 사람이 됨으로써, 당신은 미래에 분기될 더 많은 평행세계에도 더 나은 버전의 당신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을 보장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내가 행하는 옳은 일은, 설령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미래의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할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삶은 몸서리칠 만큼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 삶이 숱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나의 분투는 앞으로 무한히 펼쳐질 또 다른 가능성을 조형할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한편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영화의 조부 투바키가 보는 우주가 평범한 일상인 세계를 그린다. 모두가 마음대로 평행 우주를 '매끄럽게' 오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매 순간 즐기며 살아간다. 모든 사람들이 그 환상적인 감각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무한한 가능성은 (조부 투바키에게 그러했듯) 허무의 씨앗이 되지 않고 말 그대로 '누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유토피아를 열어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주인공이 예외와 부닥치며 시작된다. 오랜만에 이쪽 세계에서 만난 친구가, 다른 모든 세계에서 만나 온 친구들과는 '달라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친구는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다리를 다친 채로 이쪽 세계에 고정됐다. 중학교까지는 육상부로 뛸 만큼 달리기를 사랑해 왔지만, 이제 그녀는 다리가 멀쩡한 세계로 현실을 교체할 수 없다. 친구는 말한다. "내 인생엔 이제 옆길도 샛길도 없어."
작품에는 친구와 같은 사고에 휘말려 불치병에 걸린 채 세계에 고정된 남자도 등장한다. 그는 복수심에 젖어 "절대적인 이상향"을 망칠 범죄를 기획하며, 친구에게 여기 동참할 것을 권유한다. 선택의 기로에 선 친구를 보면서 주인공은 결심한다. 감각을 한 세계에 고정하는 약품을 수영장에 들이붓고 그 안으로 풍덩 뛰어든 것이다. 친구를 세계에 홀로 두지 않기 위해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고정한다. 그녀가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이 어른어른 사라진 자리에는 단단한 실체를 지닌 친구만이 남게 됐다.
실상 주인공이 제 손으로 선택한 "옆길도 샛길도 없"는 삶은 우리에겐 당연한 현실인데, 이 모든 맥락을 드리우면 그것은 지상 최대의 (광의든 협의든) 사랑으로 변모함은 몹시 흥미롭다. 바로 여기서 이 작품이 SF로서 갖는 재미가 발견된다. 현실을 유일하지 '않게' 만들어 역설적으로 '유일함'의 가치를 건져 내는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음은 곧 당신을 떠나지 않음도 될 수 있겠다고 작품은 넌지시 암시한다. 그것을 곱씹으며 독자는 비로소 매끄러운 세계의 환영에서 눈을 떼고, 제 곁에 붙어 있는 — 혹은 자신을 여기 기꺼이 붙어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다.
앞서 다중 우주를 상상하는 것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다. SF는 불가능한 조건들을 상정함으로써 우리가 손에 쥔 삶을 설명한다. 소개한 세 작품 역시 각자의 방식대로 우주를 누빈 끝에 '지금 여기'로 돌아온다. 이러한 결론이 놀랍지는 않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언제나 현실이 선행하기 때문이다.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이유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궤변이라 말하거나 무의미한 삶을 합리화해 보려는 몸부림일 뿐이라고 비판해도 좋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으로 SF는 인간의 삶과 맞닿으며, 서사는 깊이를 지닌다. 각 작품 속에서도 인물이 자신이 딛고 선 현재를 긍정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여기서 앞이란 뒤와 비교해 우월한 방위라기보다, 다만 움직이기 위한 기준점에 가깝다. 무엇이든 지향하기 위해, 즉 자신에게 '앞'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붙어 있는 시공간부터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에 머무르는 일을 긍정하고 또 거기서 살아갈 방법을 궁리할 수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서 보듯 머무름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혹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 보듯 자신에게 떳떳한 미래로 가기 위해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도 있다.
무수히 많은 책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펼쳐진 페이지에 핀을 꽂고, 거기서부터 한 글자 한 글자 성실히 읽어 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 보자고 권유하는 이야기의 단단함을 좋아한다. 이 모든 쓸모없는 노력을 집어치운 뒤에 세상에서 스스로를 떼어 내고 싶은 충동을 슬쩍 밀어내는 이야기 말이다. 장르가 가능케 한 환상들을 마다하고 오롯한 현실에 핀을 꽂는 인물들을 볼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이 세계에 꽂아 보고 싶어진다.
쓰다 보니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다중 우주를 그리는 SF에 대해 한 번은 말해 보고 싶었는데 끝까지 함께해 주신 분들이 있다면 감사를 전한다. 사람마다 SF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를 수 있겠지만, 거대한 우주를 논하면서 시작한 이야기가 너구리를 쫓아 아스팔트 위를 달려야만 하는 마음으로 귀결할 때 나는 SF를 다시금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비합리가 사실 살아가기의 본질인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