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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혁 Jan 15. 2023

구원은 침묵 속에 있다

드라마 <어둠 속의 미사> 리뷰 


내가 믿는 신과 네가 믿는 신이 같은 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포경수술로 몸에 표식을 새기는 종교도 있지만, 기독교의 ‘간증’도 유별나기로 하면 그 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 같다.


따지고 들면 ‘간증’은 신앙의 감별을 위한 수단으로는 가장 부적절하다. 기껏해야 가장 주관적인 개인 경험의 조각들 아닌가? ‘간증’이라는 서사는 그래서 이 객관성을 보증하기 위해 일정한 구조를 가진다. 삶의 편린들을 불신자의 방황에서 고난으로, 그리고 다시 회심으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배치하고, 이렇게 삶의 궤적에서 물때 같은 신의 자취를 찾아내 고백한다.


일단 신의 섭리를 드러내고 나면 그 신이 과연 내가 믿는 신인가? 라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의 신은 유일신 하나님이기에. 왜 유일신 하나님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동시에 축복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도 성립하지 않는다. 저쪽 신은 거짓이고 사탄이니까. 질문은 도무지 신이 애초에 없었을 거라는 답에는 이르지 못한다. 대신 강력한 동화 작용이 벌어지거나 이질적인 것에 대한 배제가 벌어진다.


마이크 플래너건의 7부작 드라마 <어둠 속의 미사>를 보며 이 ‘간증’이 떠올랐다. 섬마을에 새로 부임한 신부는 자신이 만난 신과 기적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믿음의 근거로 광야에서의 고난과 사랑을 잃었던 아픔을 이야기한다. 그가 겪는 지금의 ‘기적’은 고난과 아픔에 대한 보상이기에 일말의 의심도 없이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반면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이고 4년을 복역한 뒤에 마을로 들어온 라일리는 이 ‘간증’의 서사를 거부한다. 인생의 바닥에 놓인 자신의 인생의 뒷장에 ‘구원’이라는 챕터를 놓기를 거부하고, 오롯이 죄책감을 마주하려고 한다. <어둠 속의 미사>는 ‘간증’ 서사를 따르는 이들과 이를 거부하는 이들을 줄기 삼아 어떤 것이 좁은 길인지를 묻는다.


언제부턴가 ‘간증’이 너무 쉬워보였다. ‘간증’에 소개된 인생역정이 만만해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라 단정 짓는 자신감은 편하기만 했고, 믿지 않는 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장한 정죄는 거칠었다. 의문이었다. 왜 거칠 것 없이 방랑했던 이들은 이번엔 부끄러움 없이 구원을 외치는가? 과거 확신에 찬 그들의 행동이 잘못이었다는 성찰은 지금 확신을 의심할 겸손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끝까지 진리에 머무는 이들은 오히려 침묵하는 이들이다. 밤마다 자신이 죽인 여자의 환영을 마주하는 라일리는 죄책감을 씻어주는 ‘은혜’와 증인으로서의 삶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온전히 구원을 이룬다. 이교도라 은근히 배척당했던 보안관도 눈앞에 벌어지는 기적을 ‘그건 신의 방식이 아니다’라며 의심하고 섣부른 판단을 보류한다.


반면 기적에 맛들인 마을의 시어머니 베브는 신비 체험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이 폭력적이었고, 그가 외우는 성경의 구절은 여전히 그의 폭력의 알리바이가 되었다. 끝까지 폭주하는 그야말로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악역이자, 지금 현실에 드리운 종교의 그림자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성찬식 때문에 실제 식인 의식을 벌인다는 오해도 받았다는데, 그 모티브를 그대로 차용한 점도 흥미롭다. 너희도 한때 이런 오해를 받으며 핍박을 받지 않았느냐고 상기시켜주는 것 같다. 미사 장면과 인물들의 주요한 감정선에서 흐르는 찬송가들도 반갑다.


몇몇 리뷰에서 기독교인이 불편할 영화라고 하는데 오히려 신자들이 함께 보면서 나눌 이야기도 많을 듯 싶다. 재앙을 기적으로 믿고 끌어들여오는 신부는 젊은 시절, 어린 라일리와의 일화를 들려준다. 죽어가는 생쥐를 가지고 와 살려달라는 어린 라일리에게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 멀쩡한 생쥐를 잡아 부활한 것처럼 꾸몄노라고.


기적을 갈구하는 자들은 오히려 기적이 아니면 세상을 신의 섭리로 설명할 언어가 없다. 아니면 자신이 부르지 않으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신에 빠져 있는지도. 이 드라마에서 가장 충격이었던 장면은 ‘신이여 어디 계십니까?’라고 부르짖었던 신부 앞에 그가 찾던 신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다.


마이크 플래너건은 ‘자기 신앙’을 설파하려는 이들에게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 진리를 알고 있다는 건 네 생각이지, 구원은 ‘침묵’ 속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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