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26. 서울인쇄센터 일지 10. 전재명 이사 인터뷰
제조업 분야 인력난 얘기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도심제조업의 인력난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2020년 서울시에서 의뢰한 연구에서는 1,500개 도심 인쇄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종사자의 평균 연령은 56.5세였다. (2020 세운 일대 산업 특성 조사보고서) 새로운 인력이 유입되지 않으면서 이런 수치는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의 인식도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인쇄 기술 인력을 통솔하고 기술 전수를 맡아왔던 ‘기장’들도 권위 의식을 많이 내려놓으면서 청년 세대와의 소통을 꾀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아직 인쇄 현장의 인력난은 쉽게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경영인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유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서울시-중구 상향적, 협력적 일자리 사업(이하 ‘상협 일자리사업’)’은 인쇄 산업에 새 인력을 유입시키기 위해 인쇄 산업의 ‘협력’을 끌어내고자 하는 사업이다. 오늘은 이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전재명 이사(라온 그룹 사회적협동조합)를 만나 사업에 대한 그의 구상을 들었다.
‘상협 일자리 사업’은 서울시와 중구가 함께 지원하는 사업으로 올해 2년 차를 맞았다. 사업은 우선 창작자를 양성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소셜벤처를 설립하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인쇄 역량이 모일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쇄 산업의 여러 현안 중에서도 이 세 가지를 선정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가장 중요한 거는 젊은 피가 없다는 거죠. 파주에 가보면 막내라는 분들이 거의 50대 후반에서 60세예요. 심각한 상황이죠. 그러다 보니 우수한 인쇄인을 배출하기 위한 어떤 출구를 마련 해야 된다고 생각이 들었죠.”
청년 세대가 인쇄에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디자인 역량을 가진 청년들 중에서도 이를 구현할 인쇄 기술을 배우겠다는 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상협 일자리 사업’은 이런 인력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옛날처럼 장비나 소프트웨어가 비싼 구조가 아니잖아요. 장비도 성능은 좋아지고 가격은 훨씬 싸졌고. 그러다 보니 이제 젊은 분들도 창업하기 쉬워졌죠. 그런 분들이 단순히 전단지를 출력하는 게 아니라 창의적인 인쇄 상품을 개발하는 등 경쟁력을 갖춘 분들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상협 일자리 사업’은 그런 이들이 수익 구조를 내고 자생할 수 있는 데까지 돕는 게 목적이죠.”
‘창작자 양성 과정’에서 배출된 인력이 산업 안에서 안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존 산업 인프라와의 연계가 필수다. ‘상협 일자리 사업’에서 구상하는 온라인 ‘플랫폼’은 양성된 인력들을 기존의 생산 인프라와 연결하여 협력케 하는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다. 이런 계획은 지금 얼마나 진전되었을까? 전재명 이사는 지난 1년 차 사업을 통해 몇 가지 문제점을 도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 시도하다 보니 시행착오가 있었죠. 크리에이터(창작자) 양성 과정에 참여한 인력도 수준이 일정하지 않아서 교육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플랫폼도 많은 인쇄인들이 참여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어요. "
2년 차에 접어든 올해는 이런 시행착오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고 한다. 플랫폼의 기능을 개선할 인력을 새로 충원했고, 창작자 양성 사업은 모집 기준과 커리큘럼은 새롭게 정비해 일정한 수준의 교육이 가능하도록 준비하고 있다.
전재명 이사는 1년 차 사업에 대해 다소 박한 평가를 내렸지만, 작년 참여자 16명 중에서 4명이 현재 소셜벤처나 협동조합 설립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참여자의 4분의 1이나 창업을 결심했다는 것은 상협 일자리 사업이 참여자들에게 꽤 선명한 비전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전재명 이사는 올해 이들의 창업을 돕는 것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한다.
전재명 이사는 올해 눈에 띄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 뚜렷한 성과가 없다면 이대로 2년 차로 사업이 종료될 수 있기 때문이다.
“2년 기한은 어차피 알고 시작하긴 했는데, 테스트하는 1년 차와 이를 보완하고 본격 가동시켜야 하는 2년 차에 사업비를 같게 책정해서 어려움이 더 크죠. 그리고 인쇄인들이 아직도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어요. 플랫폼에 앉힐 생산자 DB를 갖추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소용이냐’라는 분들이 있어요.”
사업의 기한이나 빠듯한 재원 등 외부 요인보다는 인쇄인 스스로 오래도록 학습된 무기력이 더 풀기 어려운 숙제라는 얘기였다. 아마도 그 ‘무기력’이란 중력을 거스르는 일을 오래도록 지속한 이였기에 더 절실하게 와 닿았던 듯 싶다.
전재명 이사가 재직하고 있는 ‘라온그룹 사회적협동조합’도 인쇄업을 변화시키려는 인쇄인들의 오랜 노력의 결실이다. 십여 년 전 충무로 인쇄인들의 작은 모임으로 시작해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다 지금의 협동조합 결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과정에는 친목을 위주로 하기도 하고, 인쇄인 잡지를 펴내고 캠페인을 벌이는 등 활동을 놓지 않으면서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한다.
이렇게 모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쇄인들의 ‘협력’이 있어야만 ‘상생’할 수 있다는 절박한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매번 모임의 틀은 달랐지만, 그 내용은 일관되었듯 현재 중구사회적경제지원센터와 함께하는 ‘상협 일자리 사업’도 이런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사업의 세부를 들여다보면 이런 맥락이 세세히 드러난다. 창작자 양성 과정에 참여하는 강사진들도 대부분 현업 인쇄인으로 구성하여 교육과 네트워킹이 함께 이뤄지도록 안배하였다. 이를 통해 인쇄업계에 새로 들어오는 인력들이 산업 내에 공교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기존의 인쇄인들이 새 인력이 안착할 모판이자 비빌 언덕이 되기로 나선 셈이다.
2년 차에 들어선 ‘상협 일자리 사업’이 얼마나 새 인력을 발굴할지 기대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라온 그룹과 같이 인쇄업계에서 변화를 모색해 온 인쇄인들이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새로운 도전을 그치지 않게 되는 것도 이번 사업의 중요한 가치일 듯싶다.
2023년 ‘상협 일자리 사업’에서 진행하는 크리에이터(창작자) 양성과정은 3월 중 중구사회적경제지원센터 홈페이지에서 공고할 계획이다. 인쇄에 활력을 불어넣을 인재들의 많은 참여가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