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인쇄센터 일지 16. 디자인점빵 박철성 대표 인터뷰
인쇄인들만 드나들 것 같은 충무로 인쇄단지에서 대중들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곳을 꼽으라면 두 곳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인쇄의 전 과정을 대행하는 ‘기획사’와 배움터와 인쇄사를 겸한 ‘공방’이 그곳이다. 이들이 있기에 인쇄에 전혀 문외한인 대중이 인쇄를 들여다볼 수 있었고, 인쇄업계도 대중들에게로 외연을 넓힐 수가 있었다.
오늘 소개할 디자인점빵(박철성 대표)은 그 가운데에서도 기획사와 공방을 겸한 곳으로, 특히 리소 인쇄와 레터프레스에 특화되어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확고히 한 인쇄사이다. 충무로 대한극장 뒷골목에 자리한 디자인점빵 사무실에서 박철성 대표를 만났다.
박철성 대표는 부친도 인쇄인이라 ‘2세 인쇄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인쇄업계에 들어온 것은 부친이 인쇄사를 정리한 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다. 그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분야는 인쇄와는 무관한 애니메이션 업계였다고 한다.
그쪽 분야(애니메이션) 자체가 원래 허황한 게 많아요. 몇십, 몇백억씩 얘기는 하지만 실제 작업자들의 삶이나 현실과는 괴리가 컸어요. 어느 방송사에서는 (콘텐츠 대금을 주기는커녕) 자기 채널에서 방영되면 홍보하는 거니, 수익이 났을 때 배분하자는 조건을 내걸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공허한 마음이 들어 현실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를 회고하면서 그는 ‘애니메이션 쪽 일이 환상을 좇는 것 같았다면, 인쇄사에서는 현실적으로 땅에 내려와 있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유일한 자산은 인쇄에 대한 ‘정감’과 ‘기억’뿐이었다. 이제 와 웃으며 ‘인쇄’업’만 물려받은 인쇄인’이라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당시 인쇄업계에 그의 지분은 전혀 없었다.
바닥부터 다진다는 생각으로 그가 찾은 것은 24시간 운영하는 출력소였다. 그곳에서 밤낮없이 인쇄부터 후가공 등 다양한 작업을 익히던 그는 자연스럽게 그의 전공인 디자인을 접목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고객인 디자이너들이 인쇄를 몰라 이를 보조하거나 대행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기획사’를 차리게 된 것이다.
지금도 많은 기획사가 자체 생산 시설을 갖추지 않고 있다. 대신 충무로의 인쇄사들을 공정별로 연계해 가면서 인쇄물을 생산한다. 이 때문에 개별 공정을 담당하는 인쇄사와의 신뢰 관계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고 각각의 공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감리를 보는 수고가 따르는 일이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이런 수고가 잘 읽히지 않는다. 그저 인쇄기가 없다는 이유로 군더더기 마진을 붙이는 이들로 폄하되곤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기획사만으로는 수익을 내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전체적으로 시장도 침체되고, 온라인 시장 등이 들어섬에 따라 경쟁도 너무 심해지고 하다 보니 일반적인 기획사 형태로는 장기적으로 생존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우리에게 맞는 자체적인 기법 같은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한 것이, 지금 저희가 주력하고 있는 리소그래프와 레터프레스 두 가지가 대두되었어요.
그때 박철성 대표를 끌었던 것은 리소 프린트와 레터프레스였다. 리소는 실크스크린을 디지털 방식으로 구현한 것으로 판화 같은 스타일과 색감을 구현할 수 있다. 레터프레스는 활자나 동판 인쇄를 아우르는 활판 인쇄를 통칭하는 것으로 최근 고급 인쇄에서 관심을 끄는 인쇄 방식이다.
소규모로 투자해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장비가 없을까 찾다 보니, 우연히 리소라는 거를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원래 생각이 많고 동작이 느린 편이에요. 요즘 MBTI로 치면 ‘I’ 유형인 거예요. 뜸을 많이 들였는데 리소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서는 딱 일주일 만에 장비가 저희 가게에 들어왔어요. 아마 인생 살면서 가장 빨리 움직인 것 중에 하나예요. 그러고 나서 몇 달 뒤에 레터프레스 장비가 들어왔어요.
박철성 대표를 매료시킨 리소와 레터프레스는 이제 디자인점빵을 대표하는 인쇄 기술이 되었다. 그는 이 장비로 인쇄물을 수주할 뿐 아니라, 관련한 교육들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리소그래프 워크숍은 국내에선 저희가 처음으로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하루에 40명씩 수업을 할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수익에도 도움이 되었고, 정체성을 정립하고 외부에 알려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동시에 레터프레스 수업도 했는데, 레터프레스 워크숍을 인쇄 공방 같은 곳에서 진행한 것은 거의 저희가 처음이었어요.
리소나 레터프레스를 운영하는 인쇄인은 그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들로 워크숍을 운영한 인쇄인으로는 그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가 교육 프로그램을 처음 시도한 2015년만 해도 인쇄인 사이에서는 자기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한다는 것을, 기술의 유출로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고 한다.
박철성 대표는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공개하는 방향을 택했다. 수업의 내용도 장비 조작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이 기술을 창작에 응용하는 방법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의 수업에 참여하면 반드시 창작물을 손에 쥐고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커리큘럼도 초기 하루 코스에서 점차 다양화시켜 지금은 6주 코스로 독립출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까지 구색을 갖춰 운영하고 있다. 독립출판 프로그램에서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기획했던 경험을 살려 책의 내용을 기획하는 일부터 시작해 리소 인쇄의 방법과 종이 재질, 제본에 대한 수업을 거쳐 프로그램이 끝날 때는 참여자 1인당 20권의 책을 갖고 가도록 하고 있다.
그의 선택은 적절했다. 덕분에 디자인점빵은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는 대신 적극적으로 작가들을 발굴하고, 독립출판의 수요를 만들어 가고 있다.
박철성 대표는 2004년 인쇄업계에 들어온 이후로 20년째를 맞는다. 그는 20년간의 자신의 경로를 비뉴턴유체(non-Newtonian fluid) 위를 걷는 것과 비교했다. 비뉴턴유체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유체는 그 위를 달리면 충격에 의해 유체가 단단해져 빠지지 않지만, 가만히 서 있으면 늪처럼 가라앉는다고 한다.
단박에 그의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선택을 거듭해 왔음에도 여전히 안정된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는 불안감도 느껴졌다. 그는 최근에 겪은 인쇄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어느 후가공 업체에서 네 번이나 실수하는 바람에 크게 적자를 보았다는 얘기였다.
인쇄 공정 어느 한 곳에서 실수가 벌어지면 그 앞의 공정을 모두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지금의 마진율로는 한 번 실수는 곧 적자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네 번씩이나 실수를 했다니 그의 고충을 이해할 만했다.
저희 하는 일 자체가 소규모 출력물을 만드는 업체 여럿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넓은 의미의 사고율은 한 20~30%씩 항상 있어요.
문제는 이런 사고의 책임을 오롯이 기획사가 떠맡는다는 것이다. 사고를 낸 후가공 업체야 그 공정만 다시 해주는 식으로 무마하려고 하지만 전체 인쇄물을 책임지는 기획사는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전체 생산 비용을 다 물어야 하고, 공정 일부라도 비용을 아끼고자 같은 업체에 맡기다가 이렇게 네 번씩 사고를 맞기도 한다.
‘잘 못한 사람은 없어요.’ 박철성 대표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고 한다. 충무로 인쇄단지가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진화한 네트워크 생산방식은 책임마저 분산되기에 인쇄 사고에 취약하다. 디자인점빵처럼 매번 다양한 인쇄물들을 소량 인쇄하는 기획사의 입장에서는 리스크는 커지는 반면, 이런 잠재적인 비용을 단가에 넣을 수도 없다.
이제 좀 달릴 것 같다가도 이런 일이 생기면 인쇄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광야의 시간처럼 내가 발효를 푹 시키면 충분히 숙성돼서 예수처럼 속세에서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처음에 충무로 들어올 때도 어쨌든 공장 가서 바닥부터 배우다 보면 뭔가 길이 생길 거라는 생각으로 들어왔던 거거든요.
그가 말한 ‘광야의 시간’을 20년째 보내면서 그는 오히려 한계를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 한때 상승곡선을 그렸던 부친의 인쇄사도 결국 문을 닫아야 했던 것처럼 생산과 운영에 큰 변화를 도모하지 않으면 결국은 광야가 아닌 늪에 빠져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고 한다.
골드러쉬 때 금 캐는 사람이 아니라 삽 팔고 청바지 파는 사람이 돈을 벌었다잖아요. 인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인쇄를 하는 사람보다는 정작 인쇄 업계에 재료를 대고 물류를 차지한 사람들이 돈을 벌어요. 결국에는 누가 잘못한 게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좀 많이 하고 있어요.
박철성 대표는 요즘 또 다른 변화를 준비 중이다. 인터뷰에서 그의 지향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또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철성 대표의 20년의 경로는 맨몸으로 인쇄계에 진입한 디자이너가 인쇄업계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전환점에서 자신이 가진 디자인 역량이나 콘텐츠 기획 역량으로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어왔던 것처럼 그가 이번에 찾게 될 선택지도 지난 20년간 축적된 역량을 그러모으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짐작하게 된다. 그 선택이 무엇이 되었든 20년 숙성한 인쇄의 멋과 맛을 보여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