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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혁 Jul 15. 2023

우정으로 건네는 말, ‘친환경 인쇄, 함께 시작합시다'

서울인쇄센터 일지 18. 출판사 소장각 노성일 소장 인터뷰

인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출판사 ‘소장각’의 책을 열어봤을 때 그 섬세함과 정교한 구성, 그에 따르는 숱한 노고를 감수한 편집자의 노력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다. 책이라기보다는 오브제(기존에 미술작품으로 여겨지는 물체는 아니지만 해석과 의미부여를 통해 미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소장각이 2022년 펴낸 <미얀마 8요일력>은 그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었고, <크메르 문자 기행>은 ‘제13회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정기회원전 최우수작품상’을, ‘제3회 인스퍼어워드 골든페이퍼상’을 수상했다. 책의 만듦새와 공정의 우수성을 높게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를 청한 것은 조금 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소장각이 최근 텀블벅 펀딩을 거쳐 출간한 <우정의 언어 예술>(공윤지 저)이 인쇄와 출판업계에 던지는 화두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성일 소장과 소장각의 책들 노성일 소장은 1인 출판사 소장각을 운영하며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주변부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내고 있다. ⓒ 조은호


기후 위기 시대, 출판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정의 언어 예술>은 예술교육실천가(Teaching Artist) 공윤지 작가님이 노르웨이 오슬로에 열린 제6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 대회(ITAC6)에 초대받은 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절실한 이슈로 떠오른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예술, 예술 교육의 역할에 대해 펼쳐낸 책이에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을 만든 출판사 발행인으로서 실행할 수 있는 최선의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장인 정신으로 책을 만들어오던 노성일 소장에게도 전면적인 친환경 방식의 책 제작은 또다른 도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윤지 작가가 예술가의 위치에서 지구를 생각하듯, 출판과 인쇄를 다루는 사람의 입장에서 지구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고민하는 과정 속에 이 책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5%도 양보하지 않는 고집 


<우정의 언어 예술>은 책이 꽤 큰 편인데 표지에 코팅이나 양장 제본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의 표지가 가져야 할 안정감과 단단함이 충분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표지의 제작 방식이 독특하다. 두 겹으로 되어 있어 마치 패키지가 책에 씌워져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앞표지의 날개를 뒷표지의 구멍에 끼워 자체적으로 포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표지는 친환경적인 제본 방식을 찾아본 끝에 만들었어요. 보통 이 정도 크기의 책은 무선이나 양장 제본을 생각하게 되지만,그렇게 하면 제본용 본드가 유발하는 환경호르몬을 막을 수가 없죠. 그래서 유럽에서 오래 전에 책을 만들던 방식 중에 하나인 ‘프렌치 양장’ 기법으로 만들었는데요. 본드를 사용하지 않고 종이와 종이를 종이접기 하듯이 끼워 단단하게 만드는 방식인데,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해서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아요. 저도 이 작업을 수작업으로 하느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책이 거의 천 권 가까이 됩니다.”


<우정의 언어 예술>의 인쇄 잉크는 인체와 환경에 유해한 휘발성 유기 화합물(Volatile Organic Compounds : VOCs)을 최소화하기 위해 VOCs가 포함되지 않은 무용제 잉크(non-VOCs)를 사용했다. 무용제 잉크는 주문해서 사용해야 하기에 10년 넘게 인연을 쌓아오던 인쇄소 사장님을 설득해 진행해야만 했다. 


“인쇄소 입장에서는 기존에 쓰던 잉크를 비우고 무용제 잉크를 사서 넣어야 하고, 새로운 잉크를 사용하면 그 잉크가 제대로 인쇄가 되는지, 뒷묻음은 없는지 테스트를 하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꽤나 번거로운 작업이 돼요. 저 또한 감리를 보니 기성 CMYK 잉크와 색상의 차이점이 보이는 등 몇 가지 이슈가 있었는데요. 이런 게 무용제 잉크가 갖는 특성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죠.”


친환경 잉크로 알려져 무용제 잉크보다 많이 보급된 콩기름 잉크는 VOCs 함유량이 5% 정도다. 그러나 노성일 소장은 5%도 타협하지 않고 화학물질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잉크를 사용해 책을 만들어낸 셈이다.



▲ 프렌치 양장 방식으로 제작된 <우정의 언어 예술> 표지 부분 제본용 본드를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접어 조립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 조은호


준비는 충분하다, 필요한 건 우리의 의지 뿐


<우정의 언어 예술>의 제작 과정에서는 많은 소통과 설득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산업 분야와 마찬가지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친환경 이전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저항감이 뒤따랐다. 


“코팅을 하면 재활용이 어려워지죠. 하지만 공들여 만든 책이 새것의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되기 바라는 마음으로는 당연히 코팅을 하게 돼요. 코팅을 하지 않으면 운송이나 보관 과정에서 지저분해질 수가 있잖아요. 그런 책을 받아본 서점이나 소비자는 반품을 할 확률이 높고요. <우정의 언어 예술>도 패키지에서 주로 사용하는 고급종이를 사용했지만 코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지가 지저분해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요. 생산자는 소비자의 니즈를 고려할 수밖에 없잖아요. 생산 방식이 변하기 위해서는 친환경 제품이 갖는 특성, 가치, 성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식이 필요한 거죠.”  


생각보다 친환경 종이나 잉크는 많이 보급되어 있다. 잉크는 앞서 언급된 콩기름 잉크가 대표적이고, 종이는 FSC(Forest Stewardship Council) 인증을 받은 비코팅지를 사용하면 되는데, 대중적으로 많이 쓰이는 모조지의 경우도 FSC 인증을 받은 종이나 그렇지 않은 종이가 가격이 동일하다. 결국 상당 부분이 의식적으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노성일 소장은 이미 패키지 분야에서는 소비자들이 친환경 방식의 사용 여부를 예민하게 따져 물건을 구입하고 있고, VOCs나 제본용 본드의 경우 인쇄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트렌드에 맞는 경쟁력과 노동자 보호를 챙기는 측면에서 인쇄인들이 적극적으로 친환경 인쇄 방식을 도입하기를 바란다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출판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친환경 인쇄를 바라보면 좋을까.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비용 부분을 많이 걱정하실 텐데요. 저의 경우는 기존의 방식보다 친환경적인 시도를 했을 때 확실히 비용이 많이 들었던 부분은 제본 정도였어요. PUR(Poly Urethane Reactive)제본 방식을 선택하면 무선제본에 비해 가격이 2배 정도 비싸요. 보통 책을 재활용하면 뜨거운 물에 녹이는 방법이 사용되는데,이 과정에서 무선제본과 양장제본용 본드는 환경 호르몬을 배출합니다.  PUR제본은 고열에도 녹지 않아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고, 분리배출할 수 있어서 환경적으로 좋아요. 잉크는 무용제 잉크가 일반 잉크보다 10% 정도 비싸지만 콩기름 잉크를 사용하면 특별히 비싸지 않고요. 종이는 어떤 종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가격을 바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코팅을 하지 않으면 코팅 비용을 절감할 수 있죠.”


재생펄프가 함유되어 친환경 인증을 받은 인스퍼-에코의 샘플북과 어라우드랩의 재생종이(왼쪽)와 비목재종이 샘플북 ‘종이 한 장 차이’.


친환경 인쇄를 배운다는 것은 인쇄를 익히는 또 하나의 과정 


요즘 특히 독립출판을 준비하는 작가나 출판사, 독자들 사이에 친환경 이슈는 조금씩 무게를 더해가는 추세다. 노성일 소장은 자신이 원하는 책을 만들기 위한 인쇄 관련 지식을 쌓아나간다면, 충분히 친환경 인쇄를 시도해볼 수 있다고 조언한다.  


“관련 강의에서 드리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한 장의 발주서를 제대로 완성할 수 있다면 출판인으로서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거든요. 만약 원하는 사양대로 인쇄소에 발주를 넣고 기술자와 소통할 수준이 된다면, 친환경 인쇄는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어요. 종이는 친환경 인증을 받은 종이를 사용하고, 잉크는 콩기름 잉크를 사용하고, 제본은 PUR 방식으로 진행되는 인쇄소를 찾아가면 되는 거죠. 당연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은 늘 있겠지만요.” 


올해 출간이 예정된 책만 5권이라는 노성일 소장은 <우정의 언어 예술> 출간을 기점으로 친환경 인쇄의 방향성을 갖고 가려는 의지가 확연했다. 장기적으로 옵셋 인쇄보다 환경에 좀 더 이로운 디지털 인쇄로 제작 방향을 전환하는 구상도 진행형이다. 가장 먼저 선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소장각의 책은 태국의 국민 캐릭터 ‘마무앙(Mamuang)’을 소재로 한 이야기 <토닥토닥 마무앙>이다. 웰메이드에 환경까지 생각하는 책을 만나고 싶은 독자라면 소장각의 행보를 주목해볼 만하다.



글과 사진 - 조은호, 편집 - 최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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