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동권 이야기 x 이규식>을 읽고
이규식 형을 처음 본 것은 1988년 내가 고2 무렵 교회에서였다. 그 후로 1년 정도, 형이 교회를 오가도록 휠체어를 밀었다. 그때 형의 집은 숲속에 있었다. 숲을 끼고 도는 도로의 끝은 정수장이고 숲에서 도로 건너 맞은편에는 변전소가 있었다. 당시 둘 다 경비가 삼엄한 시설이어서 정수장과 변전소에 맞붙은 숲에 사람이 살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집이 아마 책에서 형이 말한, 형이 독립시켜 달라 떼를 쓴 끝에 아버지가 지어준 판잣집이었나 보다. 집 앞 숲길은 조금만 비가 와도 바퀴가 빠져 옴쭉달싹할 수 없었고, 거기서 교회까지 8백 미터 남짓 되는 길은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휠체어의 앞바퀴가 튈 때마다 형의 비틀어진 몸은 휠체어에서 조금씩 벗어나, 조금 이동한 다음에는 형의 몸을 휠체어 등받이로 바짝 끌어당겼어야 했다.
뇌성마비라 ‘화장실’이라는 단어도 한 번에 발음할 수 없었던 형이었지만, 웃음소리는 거침없었고 수다스러웠다. 내겐 사소하고 일상이었던 것에도 형은 잘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한 일 년 정도 다녔을까? 시설에 들어간다 했고, 가끔씩 시설에서 나올 때가 있었지만 이내 뜸해져 기억에서 잊힐 때쯤 TV 뉴스에서 형을 봤다. 지하철이었던 것 같은데 형이 사슬을 온몸을 묶고 있었다.
우선은 놀랐다. 휠체어에 타고 내리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형이 저런 격한 ‘투쟁’의 선봉에 선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했다. 형의 불편을 익히 알고 있는 나였지만, 저런 ‘폭력적인’ 방식이어야 했는지. 나만의 생각은 아니어서, 그 뒤로 형이 어쩌다 교회에 올 때면 교회 어른들은 물었다. ‘꼭 그래야만 하느냐’고.
그때 형에게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듣지 못했던 대답 대신, 형은 그 이후 20여 년의 삶을 ‘싸움’으로 채웠다고, 이 책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는 전해 준다. 그리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이유를 들려준다.
책은 뇌성마비로 태어나, 시설 생활을 하다 자립으로, 또 직접 리프트 사고를 겪은 후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몸담게 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건 한편으로는 그의 몸에 가해진 폭력의 기록이었다. ‘가난’한 가족은 그에게 ‘무엇이든’ 포기하게 했고, 병에 대한 ‘무지’는 그의 굽은 몸을 억지로 펴려는 고통스러운 ‘치료’로 그를 괴롭혔다. 장애를 천형으로 여긴 사회는 감방이나 다름없는 ‘시설’ 생활을 강요했고, 그가 꾸는 모든 꿈을 사치로 만들었다.
겹겹의, 그를 둘러싼 울타리를 깨고 세상을 향해 느릿느릿 나아온 것이 형의 삶이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그는 ‘투모사-투쟁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늘 투쟁의 전위에 서는 그를, 함께 하는 ‘활동가’들도 무섭게 여겼다지만, 정작 그는 매 순간 갈등의 연속이었노라고 한다. 지하철 시위에 나갈 때면 차라리 활동지원사가 늦잠 자기를 바라기도 하고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외치며 한강대교를 기어갈 때는 너무 힘들어 경찰이 어서 와 잡아가기만을 바랐다고 한다. 30년 전 교회에서 같이 뒹굴던 규식이 형 모습이 떠올라 웃다가, 그럼에도 찢기도 밟혀도 투쟁을 이어가야 했던 그의 사정에 먹먹해지기를 거듭했다.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절박했을까. 그 두 마음을 품은 마음은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형이 검정고시를 합격한 후에 그의 아버지는 ‘네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고 털어놓았듯이, 그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그가 이렇게 ‘세상 속으로’ ‘세상의 한 가운데로’ 나서게 될 줄은 몰랐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나의 왼발>을 보면서 감동에 겨워할 줄은 알아도, 정작 우리 곁에서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자기 몸에 쇠사슬을 묵어야 했던 형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했다. 지금도 지하철에서 투쟁하는 형에겐 온갖 악플이 달린다고 한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방식은 동의하지 못한다.’ ‘왜 다른 사람에게 굳이 피해를 주느냐’
이규식 형은 책에서 말한다. 이규식 형과 함께 한 장애인들이 거리에서 버스 아래에서 지하철 선로에서 사슬을 감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는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늘어나고, 저상버스가 도입되고, ‘교통 약자’라는 개념이 생기고,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제정되었을 거라고. 그러나 이들의 몸부림이 있었기에 그 기약 없는 ‘언젠가’가 ‘오늘’이 될 수 있었노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규식 형을 두고 ‘미래를 앞당긴 사람’이라고 한단다.
나는 형을 ‘카나리아’ 같은 사람이라 부르고 싶다. 옛날 갱도 안에 가스가 차오르는지를, 사람이 인지하기 전에 알려주었던 카나리아처럼, 형은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드러내는 지표 역할을 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언젠가는 몸의 어딘가는 장애를 갖고, 불편을 겪게 마련이다. 20여 년 전 형에게 ‘꼭 그래야만 했느냐’ 물었던 교회 어른들 역시 지금은 엘리베이터 없이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이규식 형에게 말이란 석공의 망치질보다 고된 일이다. 그런 고됨을 이겨낸 형과 형의 말의 조각을 정성껏 모아 글로 만든 그의 동료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30년 전 규식이 형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 사람은 수다스러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그의 바람처럼 트랜스포머처럼 거칠 것 없이 변신하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형의 모습을 글이 담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