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한국엔 이런 기업인이 없다
이재용, 정의선과 함께 치킨을 먹던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갑자기 치킨이 든 바구니를 들고 치킨집 밖으로 나온다. 세계적인 부자들의 '치맥 회동'을 보기 위해 깐부치킨 앞에 모인 사람들이 열광하며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치켜든다. 가게 앞 인도는 물론 길 건너편에도 사람들이 운집했는데, 젠슨 황은 그 사람들 앞으로 일일이 가며 인사를 하고 같이 사진을 찍는다. 들고 온 치킨과 치즈스틱 등을 권하는 것은 덤. 10월 말이라 꽤 추운 날씨였지만, 사람들이 많아 덥다고 느껴졌는지 평소 '트레이드 마크'인 가죽 재킷을 벗은 채 검은색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밖을 돌아다녔다.
젠슨 황의 매우 적극적인 태도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한다. "사랑해요 젠슨황!", "젠슨형!!" 등을 외치며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그를 접하려고 한다. 나도 "우와"를 연발하며 바쁘게 사진과 영상을 찍는다.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을 이끄는 수장이, 서울 강남의 한 골목에 있는 치킨집에서 치맥을 하며 길거리에 있는 시민들에게 치킨을 권할 것으로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 7년 전 젠슨 황을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 그 특유의 유쾌함이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2018년 6월 대만 IT 박람회 '컴퓨텍스 2018'을 취재하면서 젠슨 황을 처음 봤다. 엔비디아의 신기술 발표 간담회를 갔는데 거기에 그가 나왔다. 행사도 행사였지만 그때 가장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것은 이 사람이 끊임없이 뿜어내는 에너지였다.
젠슨 황은 당시 약 1시간 남짓 쉬지 않고 '젯슨 자비에' 등 당시 새롭게 내놓는 신기술과 신제품에 대해 소개했다. 꽤 긴 시간이었고 기술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라 솔직히 좀 지루했는데, 그가 중간중간 청중들에게 과자와 빵을 캐치볼하듯 던지고 그걸 받은 사람들에게 "나이스" 등을 외치면서 분위기가 풀렸다. 그리고 씩 웃으며 발표를 이어갔다(참고로 나는 못 받았다).
그렇게 열변을 토하고 나서, 그는 간담회 청중들과 지나가던 관람객들의 무수한 악수와 사진 요청에 끊임없이 응했다. 미처 주지 못한 빵과 과자를 나누기도 했다. 나도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그냥 갔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좀 오랫동안 기다렸어도 미리 찍어둘 걸 그랬다(...) 그때 그는 특유의 검은 가죽재킷을 입고 있었고, 안경을 쓴 채 큰 제스처와 다채로운 표정을 총동원해 엔비디아의 기술을 발표했다. 보면서 참 재밌고 텐션 높은 아저씨라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다만 그때만 해도 젠슨 황은 잘 나가는 대만계 IT 기업인 중 1명 정도였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의 최고경영자이자 전 세계 AI 산업 전반을 이끄는 기업인으로 우뚝 섰다. 엔비디아의 칩 없이는 AI 연구개발과 서비스 상용화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제한적으로만 가능할 정도가 됐고, 전 세계 주요 정부와 기업이 엔비디아의 최신 GPU를 얻기 위해 사활을 걸고 경쟁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검은 가죽재킷을 즐겨 입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즐기며, 큰 제스처와 다양한 표정도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아, 나이가 들어서인지 머리는 하얗게 세긴 했다. 그러나 그 사이 검은 가죽재킷은 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고, 그의 말과 행동, 각종 행보는 7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심지어 그가 쓴 안경 브랜드까지 기사로 쏟아졌다) 7년 전만 해도 아는 사람들만 알았던 요소들이 이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됐다.
이는 곧 젠슨 황 본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시가총액 1위 기업의 주식이 흔들릴 수 있고, 이는 나스닥 전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올해 초 "양자컴퓨터 상용화에 20년은 걸릴 것"이라는 그의 발언 하나에 양자컴퓨터 업계 전체가 휘청였다는 점에서 이는 이미 현실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고, 언행에서 늘 자신감이 드러난다. 굳이 일반 대중들과 접촉할 필요 없이 비공개로 비즈니스 미팅을 해도 되지만, 오히려 본인이 직접 '치맥' 문화를 체험해 보고 싶다며 공개적인 간담회를 추진하기도 했다. 자칫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실수를 할 수 있다는 부담감보다는,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 따른 이점을 더욱 크게 보는 것 같다. 7년 전에도 그는 소통과 교류를 즐겼지만, 7년 후 그는 이를 더욱 전략적으로 적절하게 활용하는 느낌이다.
지난해에도 젠슨 황은 TSMC, 미디어텍 등 대만 유수의 기업 대표들과 대만 시장에서 길거리 음식을 먹으며 시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했다. 당시 젠슨 황이 먹은 대만식 굴전과 더우화(두부 푸딩) 등이 화제가 됐고, 젠슨 황이 직접 찾은 식당 리스트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젠슨 황이 대만계라서 더욱 그랬겠지만, 그때도 뉴스 기사에서 전해지는 현장의 열기는 엄청났다. 그리고 젠슨 황은 그것을 즐겼다.
문득 아무리 기자들이 달려들어 이것저것 물어봐도 마치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던 국내 대기업 총수들이 생각났다. 기자 시절, 신제품이나 신기술 발표회에 갔을 때 자신들이 직접 나오지 않고 전문경영인이나 각 사업부문별 대표가 대신 발표하곤 해 늘 아쉬웠다. 소위 '회장님'들이 직접 나오는 경우는 정말 손에 꼽았다.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워낙 파급력이 크니 조심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젠슨 황 같은 사람들과 비교하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때로는 적절한 쇼맨십이 더욱 큰 호응과 나아가 더 큰 매출로 이어질 수 있는데 말이다.
젠슨 황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이재용과 정의선이 강남 한가운데 탁 트인 치킨집에서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재용이 "왜 이렇게 아이폰이 많아요?"라고 사람들에게 드립을 치고, 정의선이 "제 아들도 리그 오브 레전드를 즐겨서 저도 해봤어요"라고 말할 일도 없었겠지. 우리 기업인들도 필요할 때는 좀 더 '나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리더가 직접 나서야 할 순간이 있다는 걸 그는 보여줬다.
젠슨 황 얘기를 조금 더 해 보자. 7년 전에도 젠슨 황은 컴퓨터를 잘 알거나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 그리고 암호화폐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엔비디아가 만든 GPU인 'GTX 시리즈'가 당시에도 장기간 GPU 시장에서 확고한 선두를 거머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GPU가 컴퓨터 그래픽 데이터 처리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만큼 게임과 디자인, 그래픽 등의 분야에선 빼놓을 수 없는 하드웨어였다. 반복적인 데이터 처리에 강점을 가졌다는 점에서 비트코인 등을 채굴할 때도 GPU가 널리 쓰였다(이러한 반복적 데이터 처리에 대한 강점은 AI 학습용 반도체로 초고성능 GPU가 널리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컴퓨텍스 2018' 당시에는 우려도 있었는데, GTX 10 시리즈가 출시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다음 시리즈에 대한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엔비디아는 GTX 대신 '젯슨 자비에'라는 로봇 특화용 AI 가속기와 로봇용 소프트웨어인 '아이작'을 중점적으로 발표했다. AI와 로봇이 결합되면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수많은 '지능형 기계'들이 혁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물론 발표한 내용 역시 나름의 의미는 있었지만 솔직히 GTX 시리즈에 대한 새로운 언급이 없어 기삿거리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그때는 있었다. 당시 외신을 봐도 이 발표에 그다지 주목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해 컴퓨텍스에서는 오히려 경쟁사인 AMD가 새로운 라데온(GPU)·라이젠(CPU) 시리즈를 발표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엔비디아는 결과적으로 그로부터 석 달 뒤 'RTX'로 이름을 바꿔 새로운 GPU 시리즈 'RTX 20'을 출시했고, 대박이 터졌다).
7년 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엔비디아와 젠슨 황은 그때부터 이미 AI와 로봇의 화학적 결합을 염두에 두고 이와 관련한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었다. 요즘 '피지컬 AI(Physical AI)'라는, AI와 로봇·자동차 등 하드웨어 간의 결합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데 그러한 개념에 대해 이때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엔비디아는 지금 이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주요 기업이 됐다.
젠슨 황은 지난주 이재명 대통령과 만나서도 '피지컬 AI'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고, 이번에 엔비디아가 한국 기업들과 맺은 파트너십의 핵심 내용도 상당수가 피지컬 AI와 관련한 협업이다. 이미 엔비디아는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까지 피지컬 AI와 관련한 생태계를 쫙 깔아뒀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관련 기술과 제품을 발표해 왔기 때문일 테다. 기술과 제품이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으니. 당시에는 그런 걸 잘 모르고 엔비디아를 그저 'GPU 잘 만드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생각이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