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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응이응이응 Jul 09. 2024

쿠팡 알바 100일 적응기 - 11

최저 임금의 이유


길을 잃어도 괜찮고,

몰라도 비난받지 않을 권리가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은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이 없다는 게 자유롭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책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수밖에는 없다.   


쿠팡의 일은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

쿠팡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든 간에 점심시간이 되면,

휴식 시간이 되면, 혹은 퇴근 시간이 되면 하고 있던 일을 중간에 멈추는 게 가능하다.


그 누구도 하던 일을 마저 끝마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처럼 출퇴근 시간이 엄격히 지켜지고 누구나 배우면 금방

일을 이어서 할 수 있다는 것은 쿠팡 알바의 장점이지만

동시에 그 일이 최저시급을 넘어서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쉽게 대체될 수 있고 책임도 지지 않는 자리가 비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쿠팡 알바의 첫날은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끝이 났다.


출근길에 타고 온 셔틀버스를 그대로 타고 퇴근길은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웠다.


첫날은 함께 교육을 받은 신규 사원들 사이에 있어서

모르거나 못해도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방패막이 있는 느낌이었지만

다음날부터 나는 온전히 혼자였다.


교육 없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바로 업무에 투입되어야만 하고

 온전히 내 몫을 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막막했지만,

다음날 셔틀버스를 타는 일만큼은 한결 수월했다.


진짜 문제는 체크인부터였다.


첫날에는 교육실에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부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를 향해 스스로 찾아가는 길에 합류해야 했으니까.


첫날에 선택한 공정은 입고였고 둘째 날에 내가 선택한 공정은 출고였는데,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하면서 신분증을 건네자 사물함의 번호와 출고라는 글자가 적힌 사원증과 함께

‘3층으로 가세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쿠팡 알바를 시작하면서 모든 단계가 미션 수행처럼  느껴졌는데 이때도 그랬다.


셔틀버스 타고 출근하기,

체크인하기에 이어서 업무가 기다리는 일터에 시간 맞춰 도착하는 것이

나의 세 번째 미션이었다.


3층에 도착해서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을 따라가면서

어제 보았던 대로 조끼를 입은 관리자들이 있는 출고 데스크를 찾았다.


처음 가본 3층은 역시 넓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는데

2층이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얗고 밝았다면 3층은 좀 더 투박하고 아주 시끄러웠다.


업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출고 데스크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는데,

간단한 체조와 교육에 이어서 pda를 챙겨 들고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할 때 관리자에게 가서 출고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옆에 잠시 있으라던 관리자는 누군가를 호출했다.


막 업무를 시작했다가 호출되어 온 사람은 50대 남성으로

오늘 나의 선생님이 될 동료 사원이었다.


출고를 처음 해보는 사람은 나 말고도 20대 여성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교육은 입고에서의 일처럼 pda와 토트로 시작이 됐다.


입고가 물건을 쿠팡의 물류센터에 넣는 일이라면, 출고는 반대로 물건을 내보내는 일이다.


출고에서 신입이 하는 대부분의 일은 집품인데, 내가 해야 할 일도 집품이었다.


집품은 주문받은 물건들을 포장해서 배송될 수 있도록

토트 안에 물건을 모아 포장사원들에게 가도록 레일에 태우는 일을 하는 거여서 어려울 건 없었다.


문제는 아주 아주 많이 걷게 된다는 것,

그거 하나였다.

  

집품은 pda로 토트라고 불리는 상자에 붙은 바코드를 스캔하면서 시작이 된다.


바코드를 스캔하면 pda에는 어느 특정 위치로 가라는 지시가 떠오르고,

지시받은 위치로 가서 그곳에 붙어있는 바코드를 또 pda로 스캔하면

내가 집품해야 하는 물건의 정확한 이름과 개수가 뜬다.


그 후에 물건에 붙어있거나 인쇄되어 있는 바코드를 스캔해서

성공했다는 알림을 보고 나면 물건을 토트 안에 담아야만 한다.


pda는 연속적으로 집품해야만 할 물건의 위치를 화면에 띄우는데

pda의 지시에 따라 물건을 채우다가 토트가 어느 정도 차게 되면

더 이상 담지 않겠다고 토트를 마감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물건을 채운 토트가 포장하는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센터마다 다르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내가 처음으로 출고 집품을 했던 센터에서는 레일에 토트를 태우는 방식이었다.


토트 자체가 무겁고 물건이 들어가니 더 무거웠지만 힘을 많이 쓰지 않으면서

토트를 레일에 태우는 방법을 잘 알려준 선생님 사원 덕분에 이 단계까지는 쉽게 느껴졌다.


오히려 pda로 하는 게임의 느낌이라 입고보다 재밌게 여겨진 부분도 있었지만

그런 느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일이 반복적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끝없이 걷는 일까지 포함되자

걷는 걸 좋아했던 내가 마치 전생의 나처럼 느껴졌다.


점심시간까지 집품을 하면서 4시간을 걷고 나서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는데,

3층에서 사물함이 있는 2층으로 내려갔다가 식당이 있는 4층으로 다시 올라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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