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말대로 메데인, 보고타에 루이스가 있다면 메데인에는 후안이!
후안만 믿어
난생처음 버스에서 하루를 보냈다. 산힐에서 부카라망가로, 부카라망가에서 다시 메데인으로 열 시간도 더 걸리는 여정이었다. 버스 터미널에 떨어지고 보니 언제 떴는지 모를 해가 반짝이고 있었다. 물티슈로 대충 닦아내고는 밤새 방치한 얼굴에서는 화창한 날씨와 대조되는 찝찝한 기름기가 묻어났다. 서둘러 씻고 싶은 마음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택시를 잡아탔다.
메데인에 도착하기 직전에 예약한 호스텔은 간판도 뭣도 없이, 이 집도 저 집도 모두 갖고 있는 흔한 검정 철문만을 두르고 있었다. 어딘가 불안했다.
“올라! 꼬모 에스딴?”
조심스레 들어서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건 청소에 한창이던 호스트였다. 예상보다 밝고 쾌활한 호스텔 분위기에 마음이 놓였다. 우리가 사용하게 될 방의 침대 시트를 갈고 있었다는 그녀의 말에 체크인 전까지 주방 옆의 해먹을 사용할 수 있을지 물었다.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가 인상적인 그녀는 쾌활하게도 “당연하지!”라고 답하고는, 양손에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 씩씩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해먹 위로 널브러진 우리의 행색이 계속 신경쓰였던 건지 쉴 공간이 필요할 것 같다며 임시로 빈방 하나를 내어준 그녀 덕에 예상보다 이르게 외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젖은 머리를 보송한 수건으로 탈탈 털며 들어선 주방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는 ‘후안’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호스트였다.
그는 만나자마자 우리의 이름을 입에 익힌 최초의 콜롬비아인이었다. 우리가 에스빠뇰 특유의 목구멍을 긁는 소리나 혀를 떠는 소리를 지독히도 어려워하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의 받침소리나 이응 소리를 지독히도 어려워했다. 그러다 결국은 종종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이름을 바꿔 부르고는 했다. 몇 번이고 다시 물으며 자신의 발음을 확인하는 후안에 절로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타인의 이름을 소중히 대한다는 건 분명 좋은 신호임에 틀림없으니까.
“메데인 와서 뭐 하고 싶은 거 있었어? 오늘은 뭐 할 거야?”
“음, 그걸 지금부터 너랑 얘기해 보려고!”
사실 우리는 메데인 시내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오늘 계획도, 내일 계획도, 내일 모레 계획도 없었다. 후안은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흰 종이 위에 지하철은 어디에서 타야 하는지, 메데인의 대표 음식은 무엇인지, 메데인에서 무얼 보고 가면 좋은지 등 하나부터 열까지, 알고 있으면 유용할 정보들을 적어 내려갔다. 당장 오늘의 일정을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후안은 변화한 메데인, 안전해진 메데인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여권을 요구하는 경찰이 있다면 절대 보여주지 말 것을 당부하며 첫 만남에서 벌어진 교육 아닌 교육을 마무리했다. 간혹 신원 확인을 이유로 여권을 보여달라 하고는 돌려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요한 물건은 호스텔에 두고 보관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주 앉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우리는 근처에 양말이나 바지를 살 수 있는 곳이 있냐고 물었다. 듣다보니 큰 도시에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처리하고 싶었던 일이 떠오른 거다. 보고타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잃어버린 팬티와 양말을 새로 구매하는 것. 어찌 보면 소박한, 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오늘은 여기, 여기, 여기 갔다가 쇼핑하고 돌아오면 괜찮겠다. 날씨도 좋으니까!”
비록 높고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의미 모를 거대 선인장과 테마파크를 땡볕 아래에서 둘러봐야 했던 후안식 여행 코스였지만, 그가 없었더라면 메데인에서의 첫날은 호스텔 침대 위에 누워 빈둥거리는 것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매일 아침 신선한 과일과 시리얼, 그리고 형형색색의 요거트와 식빵을 준비하는 것으로 호스텔에서의 하루를 시작하는 후안은, 느지막이 일어나 ‘오늘은 또 뭐를 하지’ 고민하며 주방에서 빈둥거리는 우리에게 언제나 기꺼이 일일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때로는 선생님이 되어 후안식 속성 에스빠뇰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후안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얼굴을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안정시키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를 향한 우리의 절대적인 신뢰와 무한한 애정은 그의 섬세함과 자상함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후안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메데인에서의 하루하루는 그저 그런 날들로 기억될 뻔했음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메데인은 곧 후안이었고, 후안이 곧 메데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