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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넌니 Oct 10. 2024

당근 닉네임 애둘맘으로 바꾼 이유

사랑에빠진딸기 같은 말랑한 닉네임은 이제 안녕


혹시 당근? 딸기? 아뇨 애둘맘이요.


 몇 번의 당근 거래를 해보고 요령이 붙은 후 닉네임을 사랑에 빠진 딸기(이하 사빠딸)로 바꾸었다. 사빠딸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중에 하나기도 했지만 당근 닉네임은 다른 플랫폼보다는 약간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인근의 주민들과 거래하는 당근이니까 친근한 이미지로 심리적인 장벽을 낮추되 적당한 익명성을 주면서도, 연령대나 취향을 살짝 드러내서 판매 제품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닉네임이면 좋겠다 싶었다. (앗차, 직업병이다 )


 그런 면에서 사빠딸이 딱 적당하다 싶었고 실제로 당근 생활을 유연하게 하는데 꽤 도움을 주었다. 보통은 닉네임은 떼고 대화를 하는데 딸기님이라고 불러주시는 분들도 더러 있었고, 좀 더 친근한 대화와 제품 문의가 전보다 늘면서 자연스럽게 거래 확률도 올랐다. 약속 장소에서는 혹시 당근? 외에 혹시 딸기? 도 종종 등장했고, 그런 상황이 어쩐지 귀엽기도 해서 나는 딸기라 불리는 내 당근 닉네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러던 나는 애둘맘으로 닉네임을 싹 바꿔버렸고, 더 이상 사랑에 빠진 딸기 같은 말랑한 닉네임은 당근에서 절대 쓰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네?


 밤양갱이라는 닉네임을 쓰시는 분이 프리다이빙 장비를 사겠노라 하셨다. 약속 시간이 10분 정도 지났을 때 한 남자분이 당근이세요? 아 딸기님? 양갱입니다! 라시며 헐레벌떡 인사를 하시고는, 장비 상태를 이리저리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양갱님은 장비 상태에 매우 흡족해하셨는데, 상태가 너무 좋은데 얼마나 사용했는지, 왜 이 값에 판매하는지, 이제 사용안 할 계획인지, 다이빙 레벨은 어느 정도인지, 연습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등등 굉장히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셨다.

 오 열정맨이시다, 그렇지만 이 이상 대화가 늘어나면 당근 거래 특유의 어색한 모먼트도 길어질 것 같아 사정이 생겨 당분간 다이빙을 할 수 없어 장비를 처분 중이라고 몇 번 설명드리고, 그러면 계좌이체로 하실 것인지? 로 최대한 빠르게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오늘도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생각하며 총총 돌아왔는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로 시작하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인연이 왜 여기서 나와요


 ???

  읽고 답을 안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말을 고르다 아 괜찮습니다 했다. 인연이라니, 21세기에 5일장 열리는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인에게 건넬 법한 구수한 도입부가 계속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분명 다이빙을 당분간 할 수 없어 장비를 파는 것이라 설명을 드렸는데 연습을 같이 하겠냐는 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왜? 이 거래의 어디에서 인연을 느껴버리신 건지 진지하게 되짚어 봤는데 잘 모르겠더라. 오 혹시? 싶었지만 그날도 나는 늘 그렇듯 야무지게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 더더욱 이러시는 저의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해프닝이겠거니, 진심으로 프리다이빙 같이 할 동네 친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했다.


앞으로 이모티콘, 물결 기호 압수~


 아니이 그렇지만 곱씹을수록 찝찝하고 불쾌했다. 그래서 양갱님과 당근에서 두 번 다시 조우하는 민망한 일은 없었으면 해서 차단을 했고, 비슷한 상황이 혹시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매자가 남자분이다 싶으면 묘하게 거래를 피하게 됐다. 한편으로는 내 말투가 오해를 사는 건가 싶어 자주 쓰던 이모티콘이나 물결(~)따위에도 신경이 쓰였다. 평소라면 감사합니다. 라는 메시지로 기분 좋게 완료되었던 당근 거래였는데, 거래와는 상관없는 메시지가 감사합니다 라는 말 뒤에 또 오지는 않을까 끝까지 긴장이 되었다.

 소소한 일상 중 하나였던 당근 거래가 이렇게까지 자기검열을 하고 긴장을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어느 순간에는 짜증이 났다. 굳이 표현하자면 시끄럽고 요망한 헌팅 포차에게 조용했던 내 당근 마을의 평화를 하루아침에 뺏긴 느낌이랄까.


앗차차 귀요미 지혀니는 여성분이 아니….네요?

 

귀요미 지혀니님

 불편함이 채 가시지 않은 일주일 뒤쯤 캠핑 의자를 산다는 지혀니님이 연락을 주셨다. 약속 장소를 50미터 남겨두고 의자를 들고 가고 있어 금방 알아보실 거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흰 모자를 쓰고 환하게 인사하는 분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지혀니님이 스스로를 귀요미라 칭하는 남자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잘은 모르겠지만 의자를 던져버리고 냅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냥 마음이 온통 그랬다. 그렇지만 양손에 눈치 없이 덜렁거리는 캠핑 의자 때문에 이 꽉 깨물고 네 당근이시죠? 예예 제가 딸기….라고 통성명을 할 수밖에.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입금이 확인되자마자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뒤에서 봤으면 나는 그저 화장실이 몹시 급한 절박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지혀니님은 감사하다 따위의 형식적인 답장도 없는게 아닌가? 오히려 애매한 타이밍에 메시지가 없는 편이 더 마음이 놓이던 때였던 터라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그저 자기애가 조금 넘치는 사람이었을 뿐 친절함은 입금까지만 유효한 쿨거래 지향인이셨겠거니. 괜히 내가 또 긴장을 후후.


그러나 불안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지.


남편있다구욧 1인가구 딸기가 외칩니다.


 다음 날 아침, 불안한 온점 두 개와 저 .. 혹시요로 시작하는 지혀니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진짜 제발 캠핑 의자에 대한 문의였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을 욱여넣은 물음표에도 불구하고 지혀니님은 나조차도 묻고 싶은 내 남자친구의 행방을 물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고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대화가 더 길어지는 것도 싫고 원천 차단을 해야겠다 싶어 (탄생한 적이 없는 것 같은) 남편있어요로 받아쳤다.

 

 아니 도대체 왜…?

 어이가 없고 말 그대로 정이 뚝 떨어지면서 평화로운 내 당근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혹시나 오해들을 하실까 봐 번호를 따이는 일이 자주 있을 만큼의 외모는 객관적으로도 전혀 아니며, 그날도 보통의 당근 거래처럼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프로필 사진은 사빠딸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그 짧은 찰나에 이성에게 예뻐 보일 구석 따위는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맥락없는 호감 표현은 불편해요. 특히 당근에서는요


 짧은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면을 포착해 주고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해 주시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도, 때로는 감사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당근에서만큼은 맹세코 기대해 본 적도, 다시 경험하고 싶지도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으며 전과 같은 몽실몽실한 마음으로 당근 거래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취향은 다양할 수 있지만 거래 약속 따위의 얕은 대화와 길 가다 부딪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5분 이내의 짧은 거래 시간을 생각해 볼 때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납득이 안 된단 말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일방적인 호감 표현을 당근에서 겪고 나니, 나의 당근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내가 거절한 사람이 내 게시물이 보일 만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니 그런 식의 거절이 맞았을까도 다시 생각해 봤고, 이후의 당근 거래에서도 내가 지나치게 개인 정보를 흘리고 있진 않을지 친절에 최선을 다한답시고 오해할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진 않았을지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다.


불특정다수와 함께하는 당근라이프, 그런데 이제 당신 근처에 가까이 사는 사람을 곁들인


 실망감은 애정했던 마음과 비례한다. 당근은 잘못이 없다. 다만 순진하게 당근 플랫폼을 동물의 숲 게임을 하는 것 마냥 긴장 풀고 있었던 안일한 내 잘못은 있다. 아,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요즘 세상 탓도 조금 있겠다. 나는 그저 딸기님이라고 종종 불러주는 비슷한 바운더리에 사는 이웃들과 물건을 더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용돈도 벌고, 감사합니다 같은 따뜻한 문장을 주고받는 게 좋았을 뿐이다.

 이제 예전 같은 마음으로는 당근을 이용할 수 없어 아쉽기도 하지만 확실히 경각심을 갖게 된 것은 맞다. 콘셉트가 친근할 뿐 당근도 어쨌든 익명의 다양한 낯선 사람들과 무작위로 거래를 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나 할까. 거기에 처의 불특정다수를 곁들인.


 욕심을 버리고 사빠딸에서 애둘맘으로 닉네임을 바꾸고난 뒤로 아직까지 당근 생활에는 이상 없을 무다. 애둘맘치고는 파는 물건들이 조금 이질적이라는 것과 예전만큼 내가 당근 거래에 적극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 빼고는. 다시 보통의 당근 날들인 것이다. 그래도 애둘맘이라는 닉네임이 제 역할은 하고 있는 것인지 용감한 밤양갱과 지현이의 다음 타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바라옵건데 진심으로 제발 나타나지 않기를, 나타나는 날에는 충전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된 인류애가 또 이만큼 날아가 버릴기도 모른다.


 나는 당근을 종종 이용하는 1인 가구이자 전 사빠딸 현 애둘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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