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나는 이 상자를 여는 것이 두렵다
....라고 몇 분 전 방구석에서 앉아
이 빛바랜 빨간 상자를 앞에 두고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이상자를 얼마나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미완성이었다
팔과 다리와 몸이 아직 조립도 안 된 상태였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녀의 이름은 헬렌이었다..
헬렌이라니..
이름이 있었다는 건 진짜 잊어버리고 있었다
미안 헬렌..
아주 오래전 인터넷에서 보고 당장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샀던 거 같다
왜 이 인형이었냐 하면은..
어렸을 때 집에 굴러다니던 솜뭉치와 천조각으로 이런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서 상자에 눕히고 이불(그냥 천조각 접은 것)을 덮어주며 놀았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조각을 조금 더 작게 접으면 베개가 되었다
다른 구체적인 모양새는 기억이 안 나고
그때 그 인형인 듯 인형 아닌 인형 같은 그것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하루 종일 이렇게 눕혔다 저렇게 눕혔다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걸 나는 다시 가지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생각보다 설명서가 양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중단했나 보다..라고 정당화시켜본다
아주 가끔씩 완성해야 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이미 흥미를 잃은 상태였고
몇 번의 이사 동안 정리되지 않고 계속 가지고 다녔다
인형은 참 버리기가 힘든 거 같다
그래서 집에 인형 친구들이 좀 있다
상자 안에 종이로 돌돌 말린 것이 있었다
이게 뭐지.. 하며 펼쳐보았더니 트레싱지다. 아마도 몸체 본을 뜰 때 사용했나 보다
며칠 전 온라인 연말 모임으로 ‘만원의 행복’이라는 쓸데없는 선물 주기를 했는데, 내가 보낼 선물의 포장지를 이걸로 하면 되겠다. 후훗. 이 뿌듯한 기분은 뭘까 쩝
트레싱지를 싸고 있던 종이는 지도를 출력한 것이었다. 서해안 쪽으로 놀러 갔었나 보다
근데 출력 날짜가 무려 2005년도..
뭐라고? 그게 벌써 15년 전이라고??
그래 그때는 바야흐로 내비게이션 따위는 잘 없었던 때지..
다시 잘 정리해서 상자에 넣어놔야겠다
완성되지 않은 헬렌과 언제 이별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