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의 용기
몇 주째 수정을 요구하는 번역이 있었다. 2장짜리 짧은 번역인데, 수정 요청이 많았다. 내가 보기엔 멀쩡한데 구체적으로 이것저것 수정을 요구하니 그에 맞춰 수정을 해주고 있었다. 비용도 얼마 들지 않는 번역이라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와의 관계가 있으니 꾹 참고 답장을 계속하고 수정을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밤에 오는 이메일 확인도 하기 싫어질 때가 생겼다. 영국 회사인가 그렇다 보니 주로 저녁부터 밤까지 연락이 오는데 이메일을 확인조차 하고 싶지 않아 졌다. 또 얼마나 많은 요청 사항이 있는 걸까 싶어 자다가 메일을 보고는 핸드폰을 꺼버렸다.
또 다른 번역일이 있었다. 나는 정말 생계형 번역노동자이기 때문에 들어오는 일은 시간이 되면 다 하는 편이라 번역파일을 확인하지 않고 받았더니 스캔되어 있는 PDF파일이었다. 워드나 PPT를 PDF변환한 파일은 정품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다시 원래문서에 가깝게 변환이 가능하고 번역 프로그램에서 불러들이는 것도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스캔되어 있는 경우 문자 인식이 안되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다 타이핑을 한 후에 번역을 해야 해서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린다. 게다가 기술문서라서 그럼도 있어서 정말 한 땀 한 땀 손으로 작업을 해야 했다. 문서작업을 잘하는 남편의 도움으로 작업을 마치고 보낸 뒤 잠이 들었다. 중간에 깨서 메일을 보니 코멘트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보통은 일어나서 바로 확인하는데 에너지가 생기지 않아서 핸드폰을 덮고 잠을 청했다.
오전 내내 두 메일 확인을 미루고 미뤘다. 교육받을 것도 있고 다른 일들도 있으니 마음 한구석에 미뤄두고 있었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계속 일을 했더니 에너지가 부족했다. 늘 피드백 이메일은 두렵다. 대학원시절 늘 밤에도 핸드폰을 옆에 두고 이메일이 오는 것을 기다리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미루고 미루다가 그냥 일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가만히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필요한 마음은 영원한 것은 없고 언젠가 뭐든지 끝난다는 것이다. 번역 수정도 끝이 없을 것 같지만 아마 끝날 일일 것이다.
아이스커피를 한잔 내려서 책상에 다시 앉았다. 숨을 들이쉬고 다시 메일을 확인한다. 수정사항을 파악하고 하나씩 해결을 한다. 필요하면 일 잘하는 남편의 도움도 좀 받는다. 할 수 있는 한 해보고 첫 번째 메일 답장을 쓰며 수정본을 또 보냈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말이다. 두 번째 번역 코멘트를 열어보며 긴장이 되었다. 뭔가 빠진 게 있거나 하면 어쩌지 하며 말이다. 다행히 10개 이내의 수정사항이었다. 얼른 수정해서 보냈다. 파일 열기 전의 두려운 마음이 머쓱해질 정도로 간단한 수정이었다.
30분도 안 걸려서 두 메일을 처리하고 나니, 지난밤 내내 이 메일들에 대해 걱정하던 게 별것 아니구나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래서 중요한 게 대면하는 용기구나 싶어 진다. 늘 문제 앞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나는 문제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이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보다 별것 아닐 거야라는 믿음이 쌓이는 것이다. 이번에도 메일 두 개에 답장 쓰는 일을 통해 한 번 더 대면의 용기를 쌓아본다.
누군가는 메일 답장이 뭐 그렇게 어렵냐고 그냥 빨리빨리 처리하면 되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대면하는 게 아니라 회피하는 유형인데 나는 그 정도가 많이 심하다. 내 전공이기도 한 "애착- attachment"에 대한 이야기인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보려 한다.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의 관계는 의외로 영향력이 커서 이후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타고난 성향도 조금 있다. 누군가는 문제가 생기면 즉시 대면하고 해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다. 애착은 4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안정 애착 - secure attachment"제외하고는 문제를 쉽게 대면할 수 없는 유형들이다. 인구의 1/4씩 각각 존재한다고 하니 대부분의 사람은 문제를 대면할 때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문제를 대면할 수 있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나에게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는 "대면해 보면 별것 아냐"라는 경험이 쌓이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아주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두려움이 많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대면하고 하나씩 해결해 가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풀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시간의 힘을 믿는 것, 그리고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니라는 것들을 작은 일에서부터 경험하고 마음의 힘을 길러가는 게 필요하다. 이메일 답장하는 이야기에 성격과 용기까지 필요하니 너무 과한가 싶지만, 우리의 삶은 작은 조각들이 모여 큰 그림을 그리니, 작은 조각들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타이트한 시간에 맞춰서 해야 하고 영작을 하고 검색하고 하려면 손목도 아프고 해서 자꾸 하고 싶지 않아 지지만 그래도 아마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할만한 일이니 내게 주어졌을 것이다. 이제 저녁이라 디카페인 커피를 한잔 타고 다시 한번 노트북을 열고 내 앞에 주어진 일들을 대면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