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에릭 리스는 성공한 창업가이자, 린 스타트업 운동의 주역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이 책에 최근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는 토스의 이승건 CEO가 강의 영상에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최근 스타트업으로 처음 이직을 하고,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뭐라도 공부해야지 하는 생각도 있던 차에 손에 잡히는 대로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략 2016~7년 경, 전 직장 동료가 이 책의 영문 pdf를 보내줘서 잠시 읽어봤던 적인 것 같다. 영문인 데다 스타트업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대한 얘기여서 잘 읽히지 않았고 금방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만약 그때 이 책 한국어 판을 구해서 읽었더라면 내 생각이 훨씬 많이 깨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잠시 해봤는데, 아마 당시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루하루 출퇴근하는 것만으로 삶이 꽉 차 있던 때였으니까.
돌아와서 이번에 이 책을 다 읽은 소감은, 한 마디로 매우 감명 깊었다. 스타트업 계의 사람들에게는 상식 혹은 교과서와 같은 생각을 담고 있다. "만들기-측정-유효한 학습의 순환을 통해 불확실성 속에서 생존하고 Product Market Fit을 찾고, 계속해서 혁신해나간다"는 개념, 이걸 제대로 하기 위해 올바른 실험과 데이터 분석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생각. 사실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개념들이다. 심리학 실험 연구로 석사 논문을 쓰고 9년째 데이터 분석가로 일하고 있고, 지난 몇 년간 투자 공부를 통해 불확실성과 리스크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으니까.
한편으로 지난 직장 생활을 돌아보면, 이 당연한 생각들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꽤나 길었던 것 같다. 전 직장에서의 마지막 2~3년 간 실험을 진행해봤던 것이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다고 새삼 느낀다. 만약 그 경험이 아니었다면 나도 심리학 실험 연구자의 정체성을 잊은 채, 의미 없는 데이터 분석을 반복하는 기능인으로 살아갔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전 직장에서의 경험을 조금 더 곱씹어보면. 실험 업무를 하게 된 후로는 그 전까지의 데이터 분석 업무와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기획해서, 실험으로 성과를 측정하고, 피드백을 받아서 그다음 기획을 하고 실행을 반복하는 경험을 했다. 이건 그 전의 업무 경험과 비교하면 차이가 명확해지는데, 실험을 하지 않았을 때는 사실상 제대로 된 피드백을 어디에서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인과관계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실험이다. 실험을 하지 않았을 때 받을 수 있는 피드백이란, 검증되지 않았고 검증될 수도 없는 주장들 뿐이다. 좀 더 심한 경우엔 그저 목소리만 큰 사람들이 막연한 감 혹은 개인적 경험으로 "라떼는"을 시전 하는 걸 들어줘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이런 일로 인해 허무한 감정을 크게 느낄 때면, 데이터 분석가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많은 데이터 분석가가 이런 허무한 감정을 느끼며 데이터 잡부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린 스타트업 방법론에 깊은 공감을 지닌 사람들과 한 팀에서 일하는 것은 데이터 분석가라는 직업인으로서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당연한걸 이렇게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좀 웃프긴 하다만. 한국 사람들도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고, 성공적인 스타트업의 경험을 함께 하며 성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각이 깨인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듯 하니, 앞으로는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십여 년 전 사회 초년생일 때의 업무 경험과 지금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의 인식 수준이 많이 개선되었음을 느낀다. 사회 초년생 시절 백화점 고객 분석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던 적이 있다. VIP 고객에게 제공하는 혜택 카탈로그(일종의 쿠폰)의 ROI를 개선하기 위해 AB test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가, "소중한 vip 고객님들에게 그런 걸 할 수는 없다"라며 단박에 거절당하는 걸 목격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조직문화를 가진 기업에서는 목소리 크고 힘센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경향성이 있다. 실무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1안, 2안, 3안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만들어내고, 그런 일을 하기 싫어서 마음속에 사표를 품고 다닌다.
지금 내가 속한 조직은 실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 결정하는 문화가 전사적으로 퍼져가는 중이다. 적어도 이제 "실험을 왜 해요?"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없고, "실험을 왜 안 해요?"라는 질문이 더 상식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지난 10년 간 많은 사람들이 데이터의 중요성을 얘기한 게 그저 뜬소문만 실어 나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인식에도 어느 정도 변화를 일으킨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