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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Dec 08. 2019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실종된 정치 토론을 살려내기 위한 공통 원칙을 제안하다

저자 로널드 드워킨은 법학자이자 철학자이다. 하버드대 철학과, 옥스퍼드대 법학과,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후 세계적 로펌 설리번 앤 크롬웰에서 일하다 1962년 예일대 로스쿨 강의를 계기로 학계에 진출했다. 옥스퍼드대를 거쳐 런던대와 뉴욕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자신의 이론을 재판이나 구체적인 사회문제에 적용하는데 적극적이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홀베르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이 책의 원서는 "Is Democracy Possible Here?"이라는 이름으로 2006년 3월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두껍지 않은 분량이었으나, 철학자의 치밀한 논증을 곱씹으며 따라가며 읽느라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저자는 미국 정치에서 토론다운 토론이 실종되고,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며 자극적인 수사를 남발하는 저질 정치가 성행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저자가 '어떻게 하면 미국 정치를 다시 정치답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고민하고 미국 사회에 건네는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법철학자의 논증은 모든 미국인이 동의할 수 있는 두 개의 기본 원칙 위에서 전개된다. 첫 번째 원칙은 '본질적 가치의 원칙'으로, 모든 개인은 잠재적 가치를 지닌 주체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개인적 책임의 원칙'으로, 누구나 자기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할 특별한 책임, 어떤 종류의 삶이 자신에게 성공적인 삶인지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가볍게 읽으면 평등과 자유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저자의 논증은 이 원칙의 의미를 깊게 곱씹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이 두 개의 원칙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저자의 생각대로 이 두 개의 원칙이 정치적 성향을 넘어 모두의 공통 전제로 받아들여진다면, 정치 논쟁은 '모두가 공유하는 근본적 가치에 대한 최선의 해석을 두고 펼쳐지는 논쟁'이 된다. 이는 토론다운 토론이 실종되고 원색적 비방과 허구적 수사가 난무하는 현실 정치와 비교해보면 엄청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2장부터 4장까지는 현실정치에서 첨예한 대립을 낳고 있는 주제들 - 테러와 인권, 종교와 존엄, 과세와 정당성 - 을 개관하고, 두 개의 기본 원칙으로 이 사안을 해석하고 논증한다. 저자는 자유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두 원칙에 대한 자유주의자로서의 논증을 치밀하게 전개한 후 보수주의자의 예상되는 반론을 검토하고 논박한다. 또한 자신이 보수주의자의 모든 논증을 예상할 수 없으니, 보수주의자의 새로운 논증을 언제든 환영한다고 덧붙인다.


5장에서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인 다수결주의 견해 (다수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면 충분하다)와, 동반자 견해(정치적 소수자 또한 시민사회의 동반자이므로 일방적으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를 제시하고, 두 개의 기본 원칙을 제대로 충족하려면 동반자 견해를 따라야할 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리고 동반자 견해를 추구한다면 현재의 미국 민주주의는 결함이 많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민주주의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중등교육에 현대정치 과목과 토론 도입), 선거 방송(공영 선거방송의 설립과 신중한 운용), 헌법 개정(대법관 임기 무제한에서 15년으로 축소)제안한다.


나는 논리적 사고, 지적 회의주의,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태도, 과학의 가치를 믿는다. 현실정치에서 정파를 넘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전제를 설정하고, 그 위에서 토론다운 토론을 되살려내자고 제안하는 드워킨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2019년 12월 현재 한국의 현실 정치는 2006년 드워킨이 이 책을 써낸 당시에 비해 조금도 더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 이런 현명한 생각을 제안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현실정치는 개선이 안되고, 오히려 퇴행하기까지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짧아서 그런 것일까. 대략 대통령 직선제부터로 잡아도 이제 겨우 30여 년 남짓밖에 되지 않아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다 제각각이고 아전인수격으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진리라고 우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편 드워킨이 이 책을 써내며 직접적으로 제안한 미국 정치도, 2019년 12월 현재의 한국이나 2006년의 미국에 비해 딱히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은 거의 변하지 않은 듯 보인다. 사람들은 잘 안 바뀐다. 차라리 일단, '인간의 정치적 사고와 행동의 작동 기제에는, 본성 깊은 곳에 아주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향성 같은 것들이 있다. 생각 자체를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보려는 시도도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겸허하게 설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는 철학보다는 진화심리학에서 더 좋은 조언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퇴보했는가? 그런 우울한 논리를 전개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곰곰이 생각을 곱씹어보니, 그나마 조금은 나아진 점이 있는 것도 같다. 이 책의 3장에서 드워킨이 '종교적 우파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신학적인 입장만 고수하고, 자유주의적 입장도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이라고 비판한 것처럼, 과거 한국 정치는 파렴치한 보수와 그에 못지않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날 선 진보의 싸움판이었다. 각자의 입장에서 왜 그랬을 수밖에 없는지 이해는 하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내 기억 속의 상징적인 사건은 2012년 대선 토론회에 나온 이정희 후보의 '다카키 마사오의 딸' 발언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였고 박근혜 후보가 그 딸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원색적으로 비난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은 모두 그 사실을 알면서 지지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원색적으로 비난할 필요가 굳이 없었고 그 결과도 좋지 않았다. 사람은 욕을 먹으면 발끈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이 욕먹어도 발끈한다. 여러모로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정희 후보가 TV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렇게 행동했다는 건, 정치 토론장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일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열광했을 수도 있다. 그게 당시 한국 진보의 수준이었다고 봐도 과히 틀린 얘기가 아닐 것 같다. 당시 보수 진영에서 낸 후보가 박근혜였다는 사실도 당시 보수의 수준이었던 것이고.


좀 세게 말하면, 2012년 당시의 한국 정치는 토론다운 토론을 할 수 있는 토양이 전무했다. 보수는 논리를 포기했고 진보는 논박과 인신공격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럼 '2019년 현재는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는가?'를 반문해보면,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는가'가 내 대답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달팽이처럼 더디게 지난한 과정을 밟으며 조금씩 진전해가고 있다.


매년 다수당의 졸속 입법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몸싸움이 반복되는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에 다수 국회의원이 공감한 결과 2012년 국회선진화법이 제정되었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은 '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로 제한되었고, 소수당의 저항권을 보장하는 장치로 필리버스터를 부활시켰다.


물론 법과 제도가 바뀐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2016년 정의화 의장은 테러방지법을 가결시키기 위해 '전시 사변 혹은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국한되어야 할 직권상정을 강행했고, 야당은 장장 9일 간의 필리버스터 끝에 전략적 후퇴를 했다. 테러방지법은 본회의에서 민주당 전원이 투표에 불참한 가운데 157명 중 찬성 156표 반대 1표로 가결되었다


3년 뒤 2019년, 야당이 된 자유한국당은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신설을 개악으로 규정하고 199건의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관련기사: 필리버스터 법안, 2016년 민주당 1건 vs 2019년 한국당 199건 / 중앙일보). 자유한국당은 이번 필리버스터를 두고 인천상륙작전에 버금가는 전략이었다는 자평을 낸 반면, 한편에서는 사실상 민식이법 등 다수 민생법안을 볼모로 잡아 선거법과 공수처를 내주지 않으려는 인질극이라는 비판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다.


어쨌거나 국회선진화법은 한국의 민주주의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입법 취지에 맞지 않게 악용되고 있다는 우려를 마주하면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본래의 의도에 맞게 선용된 것인지, 악용된 것인지는 여론과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무제한 발언권 보장으로 의사 진행을 저지하는 필리버스터가 정치 토론 문화를 살려내는데 얼마나 기여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힘으로 누르거나 문 걸어 잠그고 떼쓰는 것만으로는 다수결주의조차 관철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국회의원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물론 이런다고 쌈박질만 일삼던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해 성숙한 토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고인 물은 나가고 새로운 물이 들어올 필요가 있으며, 최근 명망 있는 초선 의원들의 재선 불출마 선언이 한국 정치에 던지는 여운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더디고 지난하게 나아간다. 희망과 관심을 잃으면 안 된다. 드워킨도 비록 미국 정치의 현실을 개탄했지만 동시에 무한한 신뢰와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한국 시민들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 사회에 대한 희망을 놓지 말고, 항상 깨어있는 눈으로 현실정치를 바라보고 감시해야 할 것이다. 이건 타인을 위한 정의 이전에 자신을 위한 자구책이다. 마땅히 해야 할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 다음에 누구를 탓할 자격조차 없게 될 테니까.


  


책 내용 요약


1장. 공통 기반


현재 미국은 파란색(민주)과 빨간색(공화)으로 양극화되어 서로를 비난하고 혐오하기만을 일삼는다. 정치적 토론은 실종되었다. 그러나 정치가 정치답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토론다운 정치적 토론을 되살려내는 일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저자는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이 동의할 수 있을 법한 전제로 두 개의 원칙을 제시한다. 나아가 이 원칙 위에서 서로의 주장을 이해하고 논박하면서 생산적인 정치 토론을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다음은 본문 인용


첫 번째 원칙은 '본질적 가치의 원칙'으로, 모든 인간의 삶은 특별한 객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잠재성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일단 인간의 삶이 시작되면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는지가 중요하다. 삶이 성공적이고 잠재성이 실현되면 좋은 것이고, 실패하고 잠재성이 낭비되면 나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주관적 가치가 아니라 객관적 가치의 문제다. 곧 인간 삶의 성공과 실패는 당사자에게만 중요한 것이거나 오로지 그 사람이 성공을 원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만도 아니다. 모든 인간 삶의 성공과 실패는 그 자체로 중요하며, 누구나 바라거나 아쉬워할 이유가 있는 어떤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개인적 책임의 원칙으로, 누구나 자기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할 특별한 책임, 어떤 종류의 삶이 자신에게 성공적인 삶인지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런 개인적 가치를 지시하거나 동이 없이 강요할 권리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특정 종교적 전통의 명문화된 판단, 종교 지도자나 경전, 혹은 비종교적인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을 따를 수는 있다. 그러나 판단을 맡기는 것 자체는 자발적인 결정이어야 한다. 자기 삶의 독립적 책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결정한 깊이 있는 판단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첫 번째 원칙은 평등, 두 번째 원칙은 자유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다. 종종 정치철학자들은 평등과 자유가 동시에 충족될 수 없고 서로 경쟁하는 가치이며, 둘 중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평등과 자유가 상충한다는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2장. 테러와 인권


9/11 테러 직후 미국 의회는 헌법에 위배될 여지가 있는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켰고,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파병한 미군이 중요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포로를 고문하는 행위를 지시 혹은 용인했다. 한편 2004년 대법원에서 중요한 판결이 내려졌는데, 관타나모 수용소의 외국인들에게 제대로 된 법정에서 구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이었다.


부시 지지자들은 법이란 구시대의 산물이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헌법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상황이니 논점은 법이 아니라 도덕에 있다. 테러방지법을 인권과 공익(국가 안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부적절한 개념이다. 이건 이득이 비용보다 더 크냐 아니냐를 가지고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부시 대통령의 주장 -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 '9/11 테러를 이라크가 사주했다' - 는 후일 모두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검증과 별개로,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런 정책이 인권을 침해했느냐의 문제다. 만약 그렇다면, 설령 그 정책이 합법적이고 미국인들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준대도 옹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1장에서 다룬 두 기본 원칙에 따르면, 확실한 증거 없이 포로를 구금하는 행위는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신체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첫 번째 원칙 - 개인의 고유한 가치 - 과 두 번째 원칙 -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권리 - 를 모두 훼손했기 때문이다. '국가적 긴급상황에는 그렇게 해도 된다'는 주장도 논리적으로 빈약한 것이, '얼마나 긴급해야 용인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경우에는 포로들이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은 본문 인용

미국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잡아가두는 확대의 오류를 저질렀다. 겁에 질린 조심성만이 우리가 중요시하는 가치이고, 미국의 안전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보는 비열하고 비겁한 편견 때문에 용기와 위엄을 저버리는 셈이 된다. 권리와 안보 사이의 균형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궁색하다.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안전과 명예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우리는 명예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겁에 질려 있는가?

(2장. 테러와 인권 마지막 단락)



3장. 종교와 존엄


대체로 본문 인용 및 축약.


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종교적인 나라였다. 최근 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근본주의적 종교의 정치적 호전성과 공격성, 그리고 이것이 먹힌다는 사실이다. 1960년 케네디(최초의 카톨릭 당선자였다)가 당선된 뒤에는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레이건 시대에 이런 금기가 사라지기 시작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 성직자들은 대놓고 존 케리를 당선시키면 안 된다고 했고, 일부 주교단에서는 케리에게 투표한 사람을 파문해야 한다고도 했다. 부시의 선거 캠페인에는 종교적 표현이 가득했고, 재선 취임 연설은 어찌나 노골적으로 종교적인 나머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외에도 종교는 미국 사회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복음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진화론과 더불어 지적설계론을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외에도 낙태, 식물인간에 대한 연명 치료 중단, 동성결혼 등의 주제가 복음주의를 정치로 끌어들인 자석 역할을 했다. 이런 류의 논쟁 중 논쟁 다운 논쟁, 토론 다운 토론은 없다. 종교적 우파는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신학적인 입장만 고수한다. 이 논쟁에 대한 자유주의 쪽 입장도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이다. 게리 윌스는 2004년 대선 이틀 뒤 뉴욕 타임스에 '계몽의 빛이 꺼진 날'이라는 글을 실어 부시의 근본주의적 선거 유세를 '지하드'라고 비난했다.


미국인들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원칙에 공감한다. 정부는 평화로운 종교라면 어떤 것이든 관용해야 하고 무신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 관용에 대한 해석에서 관용적 종교 국가와, 관용적 세속 국가의 두 가지 모델이 갈린다. 관용적 종교 국가는 신앙과 숭배의 가치에 다 같이 헌신하되, 종교적 소수자나 무신앙자를 허용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관용적 세속 국가는 철저히 세속적인 국가를 지향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관용하고 받아들이는 국가를 지향한다. 국가마다 어떤 모델을 채택하는지는 각국의 역사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이스라엘은 관용적 종교 국가, 프랑스는 관용적 세속 국가 모델의 예다. 현재의 미국은 두 가지 모델이 혼재되어 있다.


1장에서 논의한 두 개의 기본 원칙을 심도 있게 논증하면, 관용적 세속 국가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1장에서 다룬 두 원칙 - 개인의 본질적 가치와 개인적 책임의 원칙 - 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을 자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을 타인에게 강제로 이식하려는 시도는 용인될 수 없다. 이 논리를 현실 정치의 낙태, 동성혼 문제로 연결하면,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레몬 기준 - 연방대법원에서 같은 이름의 사건에서 선언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특정 종교 단체의 이득을 위해 의도되었거나, 그런 이득을 가져다주는 국가 제도를 금지한다.


한편 지적설계론이라는 사이비 과학이 인기를 끌면서 진화론 대 지적 설계론의 논쟁이 확산된 바 있다. 부시 대통령 '둘 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이는 조금 다른 논리, 즉 지적설계론은 과학계의 표준 지식 검증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 사이비 이론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상식적인 해석을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진화론을 기각할 수 있는 이론이 과학계의 검증 절차를 통과해 정설로 인정받는다면 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4장. 과세와 정당성


1장의 두 원칙으로부터, '정부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진술을 도출할 수 있다.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잠재적 가치를 보장할 수 있고,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정부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가 과세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나갈 수 있다.


경제학에서는 사후 평등과 사전 평등이라는 개념을 구분해서 쓴다. 시민들의 부의 격차가 얼마나 일하고 저축하고 소비할지에 대한 결정에 따라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면, 그 공동체는 완전한 사후 평등을 이룬 것이다. 사전 평등을 추구하는 정부는 사람들이 불평등해질 수 있는 사건이나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사람들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극단적인 평등주의자들을 제외하고, 많은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저자는 사전 평등을 지지한다. 저자는 사후 평등의 추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공동체의 과세제도를 '보험 은유'를 통해 설명해 나간다.


저자는 세금을 일종의 보험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보자고 제안한다. 모든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의 불운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 외에도 타고난 재능, 운, 물려받은 재산 등에 따라 불평등한 삶을 살아간다. 따라서 사람들마다 보험을 들 수 있는 능력은 같지 않다. 이는 곧, 일반 시장에서는 적절한 수준의 사전 평등을 이룩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소득과 재산이 많은 사람은 보험료를 지불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보험료를 지불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사전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누진세를 도입해야 한다.


어떤 시민이 불행한 일을 겪는다면 정부는 각종 복지 제도를 통해 그 사람이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게 조치해야 하는데, 이는 1장의 두 원칙을 이행하는 행위이다.


다음은 개인 소득의 소유권과 관련해 인상 깊었던 내용 본문 인용

이것이 일률 과세에 대한 도덕적 옹호의 핵심이다. 정부에서 걷어가는 것이 내 돈이고, 내 동의 없이 가져가므로 내가 입는 혜택만큼만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내가 월급이나 배당금이나 유산으로 받은 돈을 가질 수 있다는 도덕적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 노력이나 재능으로 돈을 벌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에게 돈을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노력이나 재능, 투자, 운 등을 통해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정치적 합의에 의한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내가 특정 정치적 합의(이를테면 내 세금을 낮춰주는 것 등)를 누릴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 정치적 합의가 내가 벌거나 받은 것을 더 잘 지켜주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합의의 내용이 바뀌면 내가 벌거나 상속받는 돈이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다.
... 따라서 세전 소득이 '내' 돈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박약하다.

(4장 167P 중)



5장.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인들은 논리와 이성이 아닌 이미지와 수사로 대중의 마음을 얻으려 하고, 대중은 이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점차 자연스러워져 가고 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미국 정치의 수준이 너무 낮아져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입지조차 위협하고 있으며, 미국 정치 질서의 정당성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우려를 보인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답은 서로 다른 견해를 따른다. 다수결주의 견해에 다르면, 민주주의란 다수의 뜻에 의한 정치다. 그러나 동반자 견해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집단적 정치 과업에서 서로를 완전한 동반자로 여기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며, 따라서 다수결에 따른 결정은 완전한 동반자로서 각 시민의 지위와 이해를 보호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민주적이다. 동반자 견해에 따르면, 소수자나 다른 집단의 이해를 계속 무시하는 공동체는 설사 완벽한 다수결주의에 따른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다고 할지라도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미국 역사에서 두 가지 견해에 대한 민주당과 공화당의 선호는 고정되지 않았고 시기에 따라 몇 차례 바뀌어왔다. 현실 정치의 파워 게임에서도 다수결주의는 다수당이, 동반자 견해는 소수당이 선호할 만한 견해다.


다수결주의 개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분포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뿐, 이 의견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다수결주의 견해를 채택한다면, 현재 미국 정치 상황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지닐 수 있다. 반면 동반자 견해를 따른다면, 정치 논쟁의 부재는 민주주의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뜻이 된다. 동반자 관계의 핵심은 상호 관심과 존중이기 때문이다.


다수결주의는 몇 가지 점에서 결함이 있다. 대의민주주의의는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참정권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직업정치인이나 공무원 같은 사람들은 타인에게 정치적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일반인에 비해 막강하기 때문이다. 한편 수학이나 과학적 문제에 대한 해답과 달리, 정치적 사안의 경우 다수의 판단이 항상 옳지 않았던 역사적 사례가 수두룩하다. 따라서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면 다수결주의는 의사결정의 편의성 면에서는 장점이 있으나, 과정과 결과에는 결함이 많다.


동반자 견해는 미국 헌법에 잘 들어맞는다. 미국 정부는 대의제 정부이고 준-보편 성인 참정권을 보장하며, 적절히 잦은 선거를 치른다. 그러나 이런 투표에 미치는 영향의 산술적 평등만을 고집하지는 않으며, 상원제나 필리버스터 같은 몇몇 입법 제도는 다수결 원칙을 강화하기보다 제한한다. 그 누구의 투표권도 개인의 동등한 중요성과 삶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며 박탈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동반자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 저자는 이를 위해 교육, 선거 방식, 헌법 해석 방식에 변화를 고려해보자고 주장한다. 교육에 대하여, 중등 교육 과정에 '현대 정치'과목을 넣어 건전한 정치 토론을 학교에서부터 경험하게 하자는 제안이다(상당히 공감했다). 선거 방식에 대해서는 대선 기간 공영 선거 방송 채널을 운영하는 것, 민영 방송망과 계열사 규제, 논평의 권리 등을 제안했다. 법리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다는 비판이 따를 수 있으나, 저자는 정치인들이 정치 토론을 제대로 하고 이를 유권자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게 하는 게 민주주의 근본 가치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헌법과 관련하여, 대법관의 임기가 종신인 것은 문제가 있으므로 15년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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