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티베트에서 만났던 그 라마승려는 잘 살고 있을까
나는 지금 프랑스의 작은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살고 있다. 시내 거리를 산책을 하다가 익숙한 분위기의 반가운 가게를 발견했다. 바로 티베트 전문 가게였다.
여러 가지 소품들을 팔고 있는 가게였는데 익숙한 문양들과 화려한 색들의 장신구들이 눈에 띄었다. 동양인이 들어오자 가게 주인이 관심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가게 주인은 전형적인 프랑스 백인이었다. 내가 티베트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니 매우 반가워하며 이것저것을 소개하고 싶어 했다. 여러 가지 티베트의 물건들을 보다 보니 추억에 잠기게 되었다.
20대 초반, 대학교 동아리 사람들과 같이 티베트의 사람들을 촬영하겠다며 티베트를 갔었다. 그래. 맞다. 내가 카메라를 처음 제대로 잡은 곳은 티베트였다.
5천 미터 산을 등반하며 고산병에 시달리기도 하고, 버스로 가던 중간에 폭우 때문에 길이 무너져 며칠 동안 근처에서 묵다가 산을 타고 걸어서 넘어가기도 하고(중간에 폭파작업 때문에 돌에 맞을 뻔하기도), 라마승려들과 친해져 심지어 그 집에까지 가서 잠도 자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겁이 없었던 거 같다.
하지만 정말이지 너무도 웅장한 ‘티베트의 그 산’, 그 압도적인 설산의 풍경 앞에 서면, 왜 티베트 사람들이 오체투지를 하며 산을 숭상했는지 마음으로 이해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나는 겨울에 갔다.)
또한 그 마음 따뜻한 티베트 사람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이름, 까마끼즈.
까마끼즈는 내가 만난 라마승려다.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젊은 승려였는데 첫눈에도 진지한 승려는 아닌 듯해 보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신나는 티베트 노래가 나오는 라디오를 옆에 끼고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며, 제대로 된 승려복장이 아닌 비슷한 색의 주황색 티셔츠(굉장히 세속적인 프린트 모양이 있는)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고, 이야기를 나누며(우리 동아리 중에는 중국어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금세 친해졌다. 그 당시 나의 중국어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게 다였고, 회화실력은 생초보에 불과했기 때문에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았지만, 까마끼즈는 왜인지 나랑 절친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까마끼즈의 본가에까지 초대받았었다.
까마끼즈의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이 살던 집은 주위에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있었다.
허허벌판에 집만 있었는데 어린 남매들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어봤더니 저 멀리 손짓만 하는 게 아닌가. 손이 가리키는 곳을 암만 봐도 허허벌판인데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우선 그 방향으로 한참을 쭉 가봤더니 이해가 됐다. 뭔가 사람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였기 때문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뭐든 할 수 있기 나름이다.
우리는 부모님이 마련해주신 텐트에서 지냈었는데(유목민들이 사용하는 딱 그 커다란 텐트 모양이었다.) 어찌나 음료와 과자를 많이 준비해주셨는지 신세 지는 게 죄송해서 거의 먹지 못했었다. 티베트의 밤, 너무도 밝은 빛을 발하며 쏟아지는 별들을 보면 에일듯한 추위도 이겨낼 수 있었다.
우리의 촬영 내내 함께하며 티베트의 사원과 승려들 인터뷰를 연결해주었던 까마끼즈. 나중에 헤어질 때 정들어서 서로 너무 아쉬워서 펑펑 울었었다. 헤어질 때 끝까지 손을 흔들며 울먹이던 까마끼즈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프랑스인들은 티베트의 독립에 관심이 많다. 가끔씩 광장에 티베트 국기가 휘날리며 FREE TIBET를 외치며, 티베트 독립을 위한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나도 티베트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으로서 늘 티베트의 독립을 응원하고 있다. 까마끼즈가 식당에서 베이징 올림픽 관련 중국 뉴스를 보면서 저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자신들하고는 상관없다고 했던 그 말을 기억한다. 중국인들과 너무도 다르고 아름다운 자신만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티베트인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언어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길 바란다.
내 티베트 친구 까마끼즈, 그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