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이야
매일매일- 짧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보통은 혼자 있을 때 그렇다. 마당을 거닐 때, 염소밥을 줄 때, 책을 읽을 때, 멍 때릴 때... 그것들은 모두 내게 좋은 글감이 되는데, 사실 그 순간이 아니면 순간의 생각은 휘리릭 지나가 글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학창시절에는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글 쓰는 일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공부하다가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꿈틀거리면 곧바로 글로 옮기곤 했으니까.
어릴 적(그래봐야 몇 년 전이지만) 썼던 글을 보면- 역시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걸 깨닫는다. (생각은 자유, 늘 변하는 것이니..) 지금의 나는 이따금 너무 깊어졌다(deep)는 생각을 한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나이는 먹고, 그만큼 갖은 경험들이 내게 축적된다. 그덕에 좋은 날들이 더 많지만, 가끔은.. 모든 것을 리셋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 것도 몰랐던 순수한 시절로. (머릿속을 백지화 시키고 싶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해지고 싶다는 말이다.
각종 사회적 이슈(이를테면 환경, 교육, 동물, 농업, 경제 등)에 대해 눈 뜨게 되면서 나는 그 주제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한번 파고들면 끝장을 보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러니 깊어질 수밖에. 누군가에겐 얕을 수 있지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나는 나만의 세계에서 심오하고 깊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는 곧 행동양식으로 나타난다.
세상의 거대한 환경문제에 맞닥뜨린 나는 근원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했다. 산업구조의 문제점, 시스템의 문제점, 인식의 문제점 등 도대체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까 알아보기 시작했다. 뉴스를 찾아보고, 관련된 연구 자료를 찾아보고,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담긴 글을 읽었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언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실들이 내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나는 점점 변했다.
꾸미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던 내가- 패스트패션의 문제점을 깨닫고 새 옷을 사지 않게 되었다. 옷이 필요하거든 구제샵에 간다. 아름다운가게와 같은 세컨핸즈샵 혹은 빈티지샵. 그 안에서 소비를 한다. (한때는 소비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구제샵에서 내 맘에 쏙 드는 옷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예쁜 빈티지 옷을 모아놓은 가게면 모를까-. 특히 심플한 티셔츠나 셔츠, 니트 등 내 사이즈에 딱 맞는 내가 필요로 하는 옷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 옷을 사지 않았다. 나의 소비와 타인의 소비가 모여 지금의 이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쁜 옷이 좋아!에서 입을 수만 있으면 되지 뭐- 라며 생각이 바뀌었기도 하고.
2년 전 화재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을 잃었다.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 메고 다녔던 45L의 백팩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당시의 나는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집에 두고 여행을 다녔다. 노마드로 살아갈 때는 자연 속에서 지내는 날들이 많았기 때문에 흙이 묻어도 괜찮은 옷차림이 그저 편하고 좋았다. 당장 버려도 괜찮은 신발을 신고 다녔다. (사실은 맨발로 다닐 때가 더 많았음) 때묻지 않은 좋은 옷과 신발은 내 여행에 방해가 되었다. 그러다 비자가 만료되어 노마드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기분이 정말 묘했다. 가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짜 실감하게 되었으니까.
이후 나는 0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당시 나는 소비를 악으로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결과를 그닥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무언가를 애써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옷장은 '누가 준 옷'으로 채워질 때가 많았다. 불이 나서 여기저기서 옷을 보내줬고, 그 외 입지 않는 옷들을 나눔받았다. 누가 준 옷은 내게 이런 의미였다. '새로운 옷 생산에 기여하지 않으며, 자원의 선순환에 보탬이 되는 것' 아마 이러한 생각은 호주 프리맨틀에서 지냈던 친환경 커뮤니티의 생활방식에서 비롯된 거 같다. (이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한도 끝도 없을테니, 차차 하기로 하자) 그러다보니 내 옷장은.. 취향도 일관성도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화장 역시 하지 않았다. 애초에 화장을 잘 안하는 타입이긴 했는데, 자연생활을 하다보니 화장품을 쓰는 것이 부담이 되어 자연적이지 않은 것들을 다 끊어버렸었다. 그런거 치고는 가진 화장품이 꽤 많았다. 물론 한국 집에 놓고 다녔었지만. 그마저도 불에 다 타버렸으니, 굳이 화장품을 다시 살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후로는 화장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거의 3년동안 화장을 안 한 셈이다. 자연스러움- 이라는 명목 아래 편한 것만을 추구해서, 나를 가꾸는 일에 무색해진 거 같다.
처음에는 이런 내 자신이 너무나도 좋았는데, 거울을 보면 왠지 울적할 때가 있다. 나의 취향을 잃어버린 거 같다. 지금의 내 모습이 변화한 내 취향일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를 드러내던 옷차림, 화장법.. 개성있던 내 모습이 그립기도 하다.
깊은 생각 안에서 나는 나를 옥죄인다. 이건 이래서 안돼, 저건 저래서 안돼.. 그러다보니 세상의 다양성이 좀처럼 내게 오지 않는 거 같다. 그런 것들은 내 자유의 걸림돌이 되곤 한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생각은 이 세상에 나를 어떻게 연결하는가.
이제는 조금 더 단순해지고 싶다. 뭐든 적당히! 더이상 내 안의 틀에 나를 가두지 않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