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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트 Sep 24. 2015

영국이야기_8 / Eastbourne

잃어버린다 해도, 잊어버리지 않으면 되는 거다.

이곳의 바다는 마주한 순간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좋았어서, 그래서 부족하나마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니, 혹시나 시간이 난다면 큰 모니터로 다시 한 번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바라본 빅벤

친구는 레미제라블을 보며 같이 졸던 순간을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유럽여행을 위해 벨기에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런던 아이

그리고 나는, 야심 차게 기획한 런던 외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스트본, 세븐 시스터즈, 그리고 브라이튼.

마음만 먹으면 당일치기도 가능했지만,

애써 보러 온 것들을 시간에 쫓겨 빠르게 잊고 싶지 않았기에

브라이튼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정말로 혼자 하는 여행.

기차에 들어서는 것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하려 하니 허기부터 들었다.



날씨운을 타고났는지, 일주일이 넘는 영국에서의 여행에서

우산이라고는 들고 다녀 보질 않았다.

어딜 가나 화창한 날씨가 쫓아왔고,

덕분에 카메라는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느새 Sunshine Coast 이스트본에 도착



런던의 기차역과는 다르게 무언가 정감이 잔뜩가는 이스트본 기차역의 풍경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기에 처음엔 외딴 곳에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유일하게 환영인사를 해주는 갈매기



두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이스트본에서도 역시나 화창한 날씨에

새로운 메모리 카드를 가득 채워보자는 포부를 다지며 시내로 들어섰다.



실은 리투아니아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모리 카드를 잃어버렸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던 때.



그나마 다행인건, 계속 머물 것이라 생각한 탓에 소소한 하나하나 사진으로 담지 않았고,

지금은 식상하지만 그때는 새로웠던 소보라스라거나 자유로 같은

그런 크고 굵직굵직 한 사진들 몇 장, 그리고 친구가 해줬던 요리 사진 몇 장이 전부였다.



가방을 몇 번이나 뒤집어 흔들고 훑어보아도,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 만한 기억의 저장소는

있을 때 잘 챙겨야 된다고 말하는 듯

절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리로 가면 바다가 있을 것 같아서

메모리 카드가 얼마라서 아깝다기 보다는,

그래도 몇 장 쌓여왔던 사진들이 안타까웠다.



바다!

잃어버린 것보다 용량이 네 배나 큰 여분의 카드가 있어 금방 괜찮아졌지만



그 탓인지, 새로운 메모리는 몇 번이나 말썽을 부렸고

덕분에 눈 앞에 있는 것들부터 조심히 잘 챙겨야 한다는 교훈을 뇌리에 새기며

셔터를 누르는 매 순간 긴장해야만 했다.



내가 물건에 대한 애착이 큰 편이라 했다.

그때는 막연히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곱씹어보니 그 말이 더 와 닿았다.


한 마디 말도 못하는 물건들에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고,

그렇게 같이 보낸 시간들 때문에 쉽사리 버리지를 못한다.

나와 다른 이들의 손길이 닿아 색이 바래고 그렇게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면서,

아주 깨끗하고 반짝거리는 새 것들로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기에.



한 노부부가 따뜻한 공기를 품은채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왔고,

잃어버린 메모리카드 탓이었을까.

같은 내용의 꿈을 삼일 밤 연속으로 꾸었다.



그 따뜻함을 가까이서 찍어보려

여기저기 폭격이 일어나는 전쟁터 한복판이었고,

무슨 연유에선지 내가 아끼는 것들을 잔뜩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드라마 유령을 보고 반해서 구매한 노트북, 해리포터에서나 나올법한 모양의 노트북 케이스. 

귀여운 홀맨 모양의 조명, 방수가 된다며 종종 물로 씻어내던 핸드폰, 꽤 시크한 남색 다이어리.


지금 잃어버려도 가슴 아플 듯한 것들을 끌어안고 어디로 가야 할지 한참을 방황하다,

꽤 깊은 구덩이를 발견하고는 차곡차곡 그 모든 것들을 쌓아두었다.



"이곳이라면 아무도 못 찾을 거야. 이 극심한 폭격에도 안전하겠지."

"내일이 되어 돌아오면 모든 게 그대로 있겠지."


그렇게 안심하며 구덩이를 흙으로 잘 덮고서는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신기하게도 꿈속에서 하루가 지나갔고 서둘러 그 구덩이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구덩이는 그대로였지만, 그 속에는 내가 아끼고 아끼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차라리 모두 없어졌으면 괜찮았을까, 이리저리 헤집어놓은 흔적이 잔뜩 남아선

아끼던 것들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들만 사라져 있었다.



너무나 허탈하고 쓰라린 맘에,

없어졌을 것이 뻔한 그 흔적들을 한참 동안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꿈속에서 벗어났다.



꿈이었구나 하는 안도감에,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을 살펴 노트북이 그대로 있는지부터 황급히 확인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꿈속에서 없어졌던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도 없더라.

한참을 멍하니 황망한 기분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리고 나서 식은땀이 가득한 채로,

두 번째 꿈속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황당한 꿈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나선,

잠시 숨을 고르고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첫째, 앞으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둘째, 잃어버린다 해도 나와 그 물건들 사이에는

이미 강한 연결이 있기에 되돌아올 것이며



셋째, 되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

잃어버린다 해도 잊어버리지 않으면 되는 거다.



곧 아쉬워질 것들을 담으려, 실은 벌써부터 아쉽기 시작한 이 곳의 일상을 담으려 셔터를 누르고 있자니

불쑥 이곳을 처음 보고 처음 느끼며 찍었던 그 잃어버린 사진들이 그리워졌다.

기적처럼 갑자기 나타나 줄 것을 줄곧 기대도 했지만 그렇지 못했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기에는 그땐 미처 그 의미나 소중함 같은 걸 잘 몰랐다.



지금 당장의 내가 괜찮기 위해 평가절하했고, 슬며시 무시해왔다.

아마 진심으로 바래왔으면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겪었던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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