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ghten과 Brighton 사이
버스가 세븐시스터즈를 벗어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끝이 어딘지 모를 만큼 광활히 펼쳐져 있는 초원과 언덕을 한 시간여 남짓 달렸을까, 그 사이 하늘은 꽤 어둑해졌고 습기로 가득 찬 창문을 슬쩍 닦아보니 거의 다 져버린 태양만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푸르디 붉고, 붉디 푸른 노을에서 두 눈을 한시라도 뗄 수가 없었다. 어디쯤 왔나 확인하려 핸드폰을 보는 사이라거나 벗어놓았던 코트를 걸치고 옆 자리에 널부러져 있던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는 사이, 그 짧디 짧은 순간에 사라져 버릴게 분명했기 때문에.
이윽고 브라이튼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관람차, 그리고 브라이튼 피어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의 마지막 운행으로 보이는 관람차의 움직임이 꽤 오랜만에 왔다는 인사로 느껴져 과한 감정몰입에 부끄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조금은 망설여지는 발걸음으로 버스에서 내려와선 예약해두었던 숙소를 찾아 나섰다. 광활한 자연에서 허둥거린 탓인지 생각보다 작았던 호텔의 방은 더없이 아늑했다. 주인장의 환한 미소가 따뜻했고, 어쩐 일로 왔냐는 그리고 밥은 먹었냐는 소소한 관심도 크게 한몫했다.
오후 세 시 남짓한 시간부터 세븐시스터즈를 거닐며 이때까지 먹은 거라곤 이스트본 행의 기차에서 먹은 사과 하나와 견과류가 전부였다. 허기짐에 못지않게 자갈밭을 걸어 다닌 두 발의 피로감이 커 침대에서 좀처럼 일어나기가 힘들었지만, 아무래도 오늘 밤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미 해는 질대로 저버렸고, 반겨주던 브라이튼 피어의 주황빛 조명도 이내 꺼져버렸다. 갓 스무 살의 겨울, 그것도 브라이튼에서의 겨울을 곱씹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서둘러야 했다.
내 스무 살의 가장 행복했고, 그만치 아리던 겨울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그 때문인지 매년 겨울이 그렇기에.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기억나는 몇 가지들이 있었다.
살짝 언덕 졌던 길. 어슴푸레 어두워지기 직전의 하늘.
차가웠던 바닷바람의 공기. 바다 내음을 물씬 내주는 갈매기 소리.
무엇 때문인지 기억 속에 브라이튼은 항상 어둡고, 항상 저녁이었다. 브라이튼 자체는 내게 있어 그리 의미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국이라하면 런던과 맨체스터 말고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일주일도 채 안 되는 며칠을 머무른 게 전부였다.
다만, 그때의 나에게 브라이튼은 그저 내가 그리워하는 이가 지내는 곳이었다.
잠시나마 함께였던 곳이었고,
그 잠시가 끝없이 되새겨지기 시작한 곳이었다.
브라이튼의 무엇을 기억한다기보다, 함께 했던 이의 손짓과 발걸음을 둘러싸고 있던 순간들을 브라이튼이라는 이름을 통해 반추해왔다. 그래서 Brighten이든, Brighton이든 내게 중요치 않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