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트 Aug 28. 2020

파리이야기_4 / 파리의 단상

온갖 핑계들

평생을 대학생일 줄 알았고 그러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는데, 어느덧 마지막 학기였고 군대라는 최후의 보루마저 없는 터라 취업 준비 활동을 해야만 했다.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여운이 진하디도 진하게 남아, 지난 유월부터 팔월까지는 지나간 여행 사진들과 글을 쓰는 낙으로 살았는데, 막상 눈 앞에 닥친 취업이라는 관문은 딱히 피할 길이 없더라.



2015년 3월의 나는, 익숙하지 않은 동유럽 국가 리투아니아에서 새로 사가지고 간 네이비색 롱 패딩 점퍼를 끼고 지내며 이곳저곳을 헤매었다. 무릎까지 길게 떨어지는 점퍼가 키를 더 커 보이게 해주는 게 좋았으며, 쫀쫀한 손목의 시보리와 항상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모자도 마음에 들었음이다. 그래 봤자 인터넷에서 구매한 카피 제품이지만, 애초에 그런 걸 잘 알지도 못했고 어디 하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점퍼를 입고 돌아다닐 때가 아니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2층의 한적한 기숙사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기숙사 방은 2인실이었지만, 같이 쓰던 스페인 룸메이트가 학기를 마치고 나간 덕에 혼자서 2인실을 쓰게 되었다. 사사건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이탈리아 친구에게 자신이 배운 요리법을 내게 전수해주는 룸메이트가 때로는 그립기도 했지만, 천성이 초식동물인지 혼자 있는게 그렇게도 좋았다.



서울과는 달리, 아니 한국과는 달리 고층빌딩이라고는 정말 도심부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곳.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시야를 막는 빌딩 같은 건 하나 없이 푸른색과 붉은색이 오묘하게 얼러진 하늘이 두 눈을 가득 채웠다. 냉장고 대신 쓰는 창문 밖 창틀에는 3리터는 족히 넘지만 0.5유로밖에 되지 않는 물이 밤새 살얼음을 낀 채 바들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 가지런히 둔 오렌지와 요플레는 좋은 아침식사가 되어주었고, 무엇보다도 선선하니 한국에선 맡아본 적 없이 상쾌한 새벽 공기는 손끝까지 퍼져 피곤이라는 느낌은 조금도 없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살얼음 낀 찬물을 통째로 들고 벌컥벌컥 들이킨 뒤, 후식으로 새벽공기를 맛보는 것은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일상이자 즐거움이었고, 이제는 마음대로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조금 아래를 바라보면, 푸르고 넓은 정원위에 연식이 조금은 되어보이는 자동차 한 대, 그리고 세모 모양 지붕에 높은 굴뚝까지 있는,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모습의 집 한 채가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낀 새벽안개 사이로 굴뚝에서는 따뜻할 것만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끔 낮에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같이 지내는 예닐곱 명의 가족의 모습이 보였고, 정원에서는 때때로 일곱살쯤 돼 보이는 꼬마 아이가 강아지와 함께 놀았다. 한국에서는 1초를 마다하고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조차 찾기 힘들었고 가끔 울리는 소리라고는 어디 그렇게 꼭꼭 숨었는지 단 한 번도 모습을 찾아보지 못한 새들의 잡담 소리가 전부였다.



여행을 갔을 때 말고는 단 하루도 그 풍광과 새벽 공기, 그리고 새들의 목소리를 놓쳐본 적이 없다. 늦잠을 잔다거나 일부러 놓치려 해도, 그때의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느 하나 건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덕분에, 때가 되면 피로감 하나 없이 일어나 지는 게 당연지사였으니까. 창문 너머의 그 풍경을 찍으려 몇 번이고 카메라를 들어보았지만, 기분 좋게 차가운 새벽 공기의 촉감이나 냄새, 그것들이 온 몸에 스며드는 기분좋은 서늘함 같은 것들은 담길 리가 없었다.



채 다섯 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누리는 향락.


그 향락과 함께 좋아하는 노래 몇 곡을 곁들이고 있노라면 어김없이 펜을 든 손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모든 것들이 내겐 너무나 달콤해, 돌아오고 나서도 오랫동안 붙잡아 두고 싶었던 마음이다.



변명을 하자면 모두 취직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는 정말 가고 싶은 곳 몇 군데만 지원해 보자 해서 시작한 취업준비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고, 세상에서 거절당하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여행의 추억들을 기록하는 것 대신에 스스로에 대한 입 발린 수식어들을 지어내야 했고, 그 안에서 논리적 완결성이나 내용의 명료함까지 갖춰야 했다. 단순히 복사 붙여넣기였으면 차라리 나았을 그것들은 질문과 원하는 대답의 양이 어지간히 달라서는 사람을 적잖이 귀찮게 했다. 그래도 꽤 정성 들여 써낸, 적게는 300자에서 많게는 1500자까지의 같으면서도 다른 답변들과 자기소개서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뿌듯하기도 했다.



낮에는 수업과 시험공부로, 밤에는 자기소개서로 점철된 마지막 학기는 얼핏 보면 퍽퍽했을 터이지만 나름의 숨구멍이 있어 버틸만했다. 여행의 기록을 이어가는 것은 무리였지만, 지난 기록들을 다시금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때론 처음에 이 곳에 나의 기억을 기록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 떠올라 시간이 지날수록 죄책감이 커지기도 했다. 그래도 간간이 들르는 이들의 발자취를 볼 때마다 감사함과 따뜻함이 큰 힘을 주었다.



간절함과 기도, 실망, 좌절 그리고 기쁨 같은 것들이 마무리되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기간도 충분히 지났다. 잠깐 멈췄던 시간 동안 지워져 버린 기억들이 꽤 있을 것 같아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보다 다시 끄적일 수 있다는 기쁨이 한아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이야기_3 / 마레 지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