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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Sep 27. 2020

보건교사 안은영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 스틸컷


은영이 보는 세상은 특별하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은영의 눈에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젤리'가 보이기 때문. 단순히 젤리가 일상에 동동 떠돌아다니는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젤리는 인간에게 무해한 존재로 동동 떠다니기만 할 때도 있지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크게 부풀어 있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아프고 상처받은 마음으로 만들어진 젤리도 있고,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단단하게 뭉쳐진 젤리도 있다.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젤리를 보는 탓에, 은영은 어려서부터 남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길을 걷는다. 하지만 문제는 은영이 손쉽게 모든 젤리를 퇴치할 수 있는 만능 퇴마사가 아니라는 것. 한때 병원에서 일했던 은영은, 살고픈 욕망이 가득 찬 젤리 세계를 마주하지만, 결국 모두를 살려내지 못해 심적으로 힘들어한다. 그런 은영에게 그의 친구 화수는 병원 대신 학교의 보건교사로 일해볼 것을 추천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렇게 은영이 보건교사로 일하며 학교 안의 젤리들과 벌어지는 일상을 줄거리로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 스틸컷


기존 영웅서사에 등장하는 히어로물로 은영을 해석하기는 어렵다. 기존의 영웅서사 문법과 은영의 캐릭터가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은영은 특별한 재주, 기이한 능력을 갖췄지만, 그가 이따금 보여주는 나태하고 게으른 모습은 영웅보다는 소시민적 태도에 가깝다. '학교 그만두고 싶다'고 푸념하는 은영의 얼굴에서는 마음속에 던지지 못할 사직서를 품은 채 꾸역꾸역 출근하는 직장인의 모습이 보이고,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마주할 때마다 환멸과 짜증이 뒤섞인 욕을 내뱉는 은영의 말버릇에서는 나약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모습이 보이기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은영을 소시민 부류에 넣기는 어렵다. 매사 귀찮고 짜증이 많은 은영이지만, 그런데도 매번 은영은 결국 칼을 쥐고 총을 들고 맞서 싸운다. 그런 은영의 모습은 영웅보다는 이상적인 어른에 가깝다. 위험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은영은 하기 싫은 일도 묵묵히, 어른이 대신 해야 할 몫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 스틸컷


안은영을 맡은 정유미의 연기는 탁월하다. 기괴하고 어려운 컨셉 속에서도, 은영의 캐릭터는 입체적으로 살아있다. 정유미는 은영이 그저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볼 뿐, 역시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는 모호한 경계를 탁월하게 담았다. 관객은 그런 은영이 나태한 게으름과 평범해지고 싶은 마음에 바닥에 앉아 엉엉 울 때, 나를 닮은 영웅의 은근한 동질감에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반대로 또 용맹스러움으로 무장한 모습과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내려는 용기를 내비칠 때, 내게 필요한 멋진 어른의 모델을 발견한 기분에 은근한 고마움과 든든함을 벅차게 느끼기도 한다.


어른의 삶이라는 게 실제로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어른의 세상은 때때로 하기 싫은 일도 묵묵히 참아야 하고, 함께를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양보하고 참아내기도 해야 한다. 전염병 확산을 위해 '잠시 멈춤'을 하는 지금과 같은 시기를 떠올려보면 더욱더 그렇다. 무더운 뙤약볕 아래 방호복을 벗지 못하던 자들도, 먹고 사는 일의 문제를 잠시 두고 버텨내는 그들도,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일상의 거리를 두는 이들도, 결국 우리 모두와 다음 세대를 위한 어른의 인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 스틸컷


<보건교사 안은영>은 일반적인 판타지 학원물 문법과는 다른 결을 가진다. '악'으로 규정된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마법과 기술을 사용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라 단정 짓기 어렵고 애매한 관계에서 '올바른 선택'을 고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볼 뿐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손에 땀을 쥐고 악과 싸우며 승리하는 과정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은영과 함께 이 모든 일이 과연 왜 벌어져야만 했는지에 대해 꼬인 실들을 풀어가며 해석하는 쪽에 가깝다.


때때로 징그럽고 기괴한, 무섭고 오싹한 젤리들의 정체는 '마음'이다. 인간의 심장을 닮은 빨간 하트 모양의 젤리가 비처럼 우수수 떨어질 때, 이 일상을 무너뜨리는 대상이 모두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쳐부수어야 하는 절대 악도 없고, 그에 맞서 싸워야 할 절대 선도 없기 때문.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적인 결말이 없으니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프레임도 없다. 결국 이 모든 감정들이 평범하디 평범한 마음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복잡한 감정들은 가볍게 용해되고 시원하게 부서져 내린다. 기괴하고 음산한 음악과 연출은 계속되지만, 이상하게도 은근한 유쾌함과 안정감이 계속 되는 이유다. 


어른이 된다는 것에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는 시즌2를 기다리며, 오늘도 자기 자리에서 애쓰고 있을 은영을 추억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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