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분더비니 Nov 16. 2021

그저 눈앞이 샛노랄 뿐이야

영화 <아네트> 리뷰



막이 내려도

이야기는 계속 된다. 


<아네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이야기를 담은 한 편의 영화임을, 자신이 만들어진 하나의 인공물임을 강조한다. 영화라서 가능한 연출, 영화적 약속과 문법은 물론, 실제 배우의 대사와 구조까지 이 한 편의 이야기가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쉴 새 없이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는 오페라와 뮤지컬, 극중극과 코미디쇼, 인터뷰와 뉴스 등 여러 이야기 전달 방식을 이용해 전개되고, 오이디푸스 왕이나 햄릿 같은 고전 비극부터 오늘날 동시대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친숙하고도 낯익은 무늬들이 희미하게 아네트 주변을 맴돈다.


이 영화가 올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도, 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이런 면모가 영화인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네트는 제안한다. 이야기를 사랑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에게, 지금 또 한 편의 이야기를 시작해도 되겠냐고, 함께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보지 않겠냐고. 그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렇게 외친다. 좋은 여행 되세요! Bon voyage!




뮤지컬 공식에 환호하는 이들에게,

어쩌면 환호받지 못할 뮤지컬 영화 <아네트>


뮤지컬 영화는 주로 현실적인 갈등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꿈을 좇아 방황하거나 사랑에 실패한 주인공은 화려한 조명 아래 아름다운 노래와 몸짓을 펼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음악이 고조될수록 그간의 불안은 해소되고 갈등도 해결된다.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탄생하게 된 배경 역시 대공황에 지친 대중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으니, 어쩌면 뮤지컬 영화는 탄생부터 비극적인 현실에 지친 이들에게 꿈같은 환상을 선물하는 역할이었으리라.


하지만 레오 까락스 감독은 기존 문법을 반대로 푼다. 그 어떤 갈등이나 어려움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명성 있는 코미디언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수록 갈등은 겹겹이 쌓인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현실도피나 환상적인 꿈을 꾸기는커녕 숨 쉬는 것조차 까먹을 만큼 착잡하고 축축한 기분을 느낀다.


그리곤 '막이 끝났다'는 한마디 말로 막을 내린다. 

그 흔한 사랑도, 멋진 교훈도, 일말의 희망도 없이, 그저 기괴한 욕망과 축축한 절망의 여운만을 남긴 채로.



붉은색 푸른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작성자의 주관적인 해석이며,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는 이드/자아/초자아라는 개념이 있다. '이드'는 쾌락에 의해서만 기능하는 동물적인 에너지인데 반해 '초자아'는 도덕과 양심으로 이드를 억제하는 정신이다. 그리고 이드의 욕구와 초자아의 엄격함 사이에서 적절한 방법을 고민하는 '자아'가 있다. 


<아네트> 등장인물은 위 개념으로 복잡하게 관계를 맺는다. 이 개념을 신호등에 대입하여 해석해보면 어떨까. 먼저 헨리의 상징인 초록색. 헨리는 이드가 강하게 움직이는 인물로, 자신의 쾌락과 욕구대로 살아가는 동물적인 본성을 보여준다. 길 위를 빠르게 폭주하는 장면과 초록색 조명 아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쇼를 하는 헨리. 대중들 역시 그의 쇼를 보며 일탈을 즐긴다.


계속해서 동물적 본능을 따라 살던 그는 결국 감옥에 수감된다. 그는 이제 좁은 초록빛 방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 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죄수가 된다. 붉은색 죄수복의 엄격한 금기의 통제를 받으면서.



그에 반해 헨리의 아내이자 오페라 가수인 안은 빨간불, 초자아에 가깝다. 정해진 큐 사인과 정해진 대사, 정해진 멜로디와 정해진 박자 안에서 엄격하게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안은, 대중으로부터 박수받고 칭찬받는다. 그녀의 완벽한 무대를 본 대중들은 살아 있음을 느낀다. 금기와 도덕, 약속과 양심의 잣대는 늘 엄격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런 가치들이 인간을 살린다. 마치 빨간불의 신호가 위험한 사고를 방지하고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처럼. 




헨리와 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네트는 초록불과 빨간불 사이에 놓인 노란 불이자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 놓인 자아다. 아네트는 매서운 폭풍우 속에서도 엄마 안을 닮아 의젓하게 울음을 참기도 하고, 자유로운 헨리를 따라 세계를 횡단하며 재능을 펼치기도 한다.


감옥에 갇힌 헨리와 죽어버린 안. 신호등에 빨간불과 초록불 없고 오직 노란불만 깜빡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초록불인 것마냥 걸음을 내딛어야 할까, 아니면 빨간불인 것마냥 우두커니 멈춰서 기다려야 할까. 세상에 홀로 남은 노란불이 묻는다. 


내가 용서해야 할까, 

잊어야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보건교사 안은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