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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Apr 04. 2019

::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주어가 목적어가 될 때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작성된 리뷰입니다.





유치원 선생님 리사의 지겹고 따분한 일상


어딘가 지칠 대로 지쳐 보이는 유치원 교사의 모습으로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시작한다. 유치원 교사의 이름은 '리사'다. 아이들이 아직 등원하지 않은 빈 교실, 리사는 작은 학생용 의자에 앉아 바람을 쐰다. 힘겨운 하루가 시작될 것을 미리 예감이라도 한 건지 혹은 어제의 피곤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는지 리사의 모습은 한없이 지치고 고단하다.



리사의 학생들은 다 여섯 살 정도. 그는 아직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친다. 스르륵 스르륵 기어 다니는 뱀snake을 설명하며 S를 쓰게 하고, 치아tooth나 코끼리의 상아tusk을 연상하며 단단하고 강한 T를 가르친다. 이렇게 유치원 교사로 20년째 일하고 있는 리사. 그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퇴근 후에는 평생 교육원에서 시를 배우는 학생이다. 열정은 가득하지만 다소 유치하고 뻔한 수준에만 멈춰 있는 리사의 시. 그런 그의 시는 수업에서 주목받지 않을뿐더러, 혹 주목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다.




Anna is beautiful
Beautiful enough for me
The sun hits her yellow house
It is almost like a sign from God


신의 신호처럼 나타난 지미의 시,

Like a sign from God


리사는 우연히 시를 읊고 있는 지미를 발견한다.  왔다 갔다 작은 걸음을 움직이며 무심하게 읊어낸 작은 소년 지미의 시에 리사는 화들짝 놀란다. 리사는 지미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이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받아 적어 내려간 지미의 시를 종종 시 수업에서 자신의 시인 것처럼 발표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미의 시를 향한 리사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커진다.



시를 향한 비틀어진 욕망


해외 영화가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제목의 주어는 사라지고 목적어만이 남았다. '유치원 선생님the kindergarten teacher'에서 '나의 작은 소년에게'로. 덕분에 어쩌면 직관적으로 느끼지 못했을 단상이 제목을 통해 도드라지게 전달됐다. 이제 리사의 삶에는 오직 '시'라는 목적어만이 활개를 친다. 그렇게 리사라는 주체로서의 주어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사실 리사가 예술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누군가에게 투여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다 자란 딸과 아들은 리사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없었다. 자신도, 자신의 아이들도 자신의 욕망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리사는 답답한 마음에 뻐끔뻐끔 담배를 태운다. 틀어질 대로 틀어져 버린 욕망에서 떠오른 것은 지미였다. 시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리사에게 꼬마 지미는 잃어버린 욕망을 발현할 기회이자 희망이다. 리사는 지미에게 자신의 오랜 열망을 잔뜩 투여하기 시작한다.



지미의 삼촌을 찾아가 지미를 지켜내야 한다고 외치는 리사의 말에는, 자신의 비극적 경험에서 오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지미의 아빠에게 지미를 왕실의 모차르트처럼 키워야 한다는 주장에서 역시 자신의 예술성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던 은근한 핑계와 고백이 전해진다. 세상은 지미를 품을 수 없다는 리사의 눈물에 자신의 예술성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계를 향한 분노가 가득 담긴다.



결국 아동 학대와 납치의 사유로 연행되고 마는 리사. 리사는 자신을 납치범으로 신고한 지미에게 적어도 경찰에게 연행되기 전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다. 모든 것을 놓은 듯 차분하게, 하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은 얼굴로 그는 천천히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빗는다. 젖은 몸 위로 그의 옷과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달라붙는다. 마치 한 편의 시가 되지 못한 채, 그저 리사의 삶에 가득 엉겨 붙기만 했던 그의 글자들처럼. 애나의 A, 뱀의 S, 치아의 T, 그리고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만lost 리사의 L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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