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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n 03. 2019

결코 귀엽지 않은 이 영화

파리의 딜릴리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작성된 글입니다

*스포일러를 주의하세요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세워 막대한 부를 키웠던 대영제국. 그들의 별명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다. 영국에서 해가 질 때쯤에는 지구 반대편 영국령에서 해가 떴다. 세계 곳곳에 영국령의 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빛을 잃지 않던 대낮의 이 나라는 늘 기세가 넘치고, 또 호기로웠다. 더 없는 부를 채웠고, 여러 방면에서 찬란한 발전을 거듭했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 속에는 그들이 기름진 빵과 포도주로 배를 불리는 동안 그 반대편에서는 무참한 학살과 폭력이, 누군가의 피, 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가 배경으로 하는 시공은 벨 에포크 시대, 파리다. 당시 파리는 풍부한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늘 찬란하고 우아하게 반짝이던 도시였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처럼,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그 이름 속에는 그만큼의 어둠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영화 <파리의 딜릴리>는 모네, 드가, 파스퇴르, 피카소 등 당대 최고의 거장들의 이름 뒤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찬란한 벨 에포크 시대의 어두운 뒷면을 입체적으로, 복합적으로 쌓아간다.


<파리의 딜릴리>의 첫 장면은 유색인종을 동물원 구경거리처럼 가둬놓은 도심 속 인종 동물원이다. 까만 피부와 하얀 피부의 대비 속에는 벨 에포크 시기 지배한 자와 지배당한 자 사이의 간극이 담긴다. 영화는 차차 그 그림자를 '아동'으로 옮긴다. 거리에서는 '납치당할까 봐' 혹은 '이미 납치되었다'는 이유로 여자아이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풍경에서 점점 사라진다는 것은, 그들이 거리 혹은 사회와 공존할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더 깊고 은밀한 곳을 향해 파고든다. 사라진 여자아이 납치 사건은 여자를 '네 발'로 여기고 그 위에 올라 타 세상을 지배하려는 마스터맨의 음모 때문이었다. 이들은 남성 중심 사회가 전복되는 것이 두려워 여자를 납치한다. 이런 시도들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아주 어린 나이의 여자아이들을 중심적으로 납치하여 네발로 기게끔 훈련한다. 이 모든 장면은 특정 종교나 사회에서 여성을 다루는 수직적 압박의 방식을 닮았고,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권리까지 철저히 말살하는 문제점들을 은유적으로 담았다. 화려했던 만큼 무심했던 당시의 그림자가 색채의 결을 타고 덧입혀진다.




유색인종으로 시작해서 어린이, 여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둘러싼 종교, 사회, 언론, 정치와 공권력 남용 문제까지. 이 복합적인 모든 문제 중심에는 딜릴리가 있다. 어디서는 너무 하얗고, 또 어디서는 너무 까맣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온 딜릴리지만, 딜릴리는 '거리 두기'와 '경계 긋기'가 얼마나 의미 없고 불필요한 싸움인지 알고 있다. 때문에 딜릴리는 이에 즉각적으로 맞서 분노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쉽게 대상을 원망하거나 실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아가 그러한 편견이 생겨난 경위와 모순을 성숙하게 인지하고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구체적으로 찾기 위해 찬찬히 고민한다.


딜릴리가 마스터맨에 의해 납치된 후, 딜릴리를 찾을 방도가 없을 듯 싶은 안타까운 상황이 펼쳐지지만, 딜릴리를 구한 것은 그의 기록이었다. 그간 딜릴리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왔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그 이름들은 딜릴리를 돕는 힘이 된다. 그렇게 발견된 딜릴리는 이전까지의 딜릴리보다 더욱 용기 있고 강한 존재다. 성숙한 태도로 쉽게 '맞짱' 뜨지 않았던 딜릴리지만, 부당함과 마주했을 때, 비인간적인 폭력을 목도했을 때, 진정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한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함께 하면서.


유색인종, 어린이, 여성에 모두 속하는 딜릴리는 벨 에포크 시대가 가진 그림자의 '객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수동적으로 풍경 속에 그려져 있지 않다. 그는 '주체'로서 이 모든 문제에 접근한다.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질문하고, 고개를 들고, 격려하고, 선언한다. '귀여움'은 은근한 권력 구도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감정이다. 무언가를 귀엽게 여긴다는 것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위협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기처럼 작고 여린 대상을 보았을 때 느끼는 편안함과 우월감이 기저에 깔린 감정이다. 대개의 애니메이션 영화가 기본적으로 '귀여움'의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딜릴리는 결코 '귀여운 소녀'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강하고 단호하다. 귀엽지는 않지만, 충분히 사랑스럽고 또 고마운 딜릴리. 당당하고 정의로운 딜릴리는 결코 귀엽지 않다.




사건을 해결해가는 딜릴리의 걸음에는 함께하는 이들의 이름이 있고, 함께 얼굴을 맞댄 시간이 있고, 서로를 위한 포옹이 있다. 한 명 한 명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고민하는 크고 작은 마음들, 하늘을 날만큼의 풍부한 동력을 만들어가는 '함께'의 힘. 그래, 함께라면, ‘가끔 인생은 정말 멋진 걸 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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