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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n 26. 2019

종료 버튼이 없는 게임

브런치X넷플릭스 :: 블랙 미러





그간의 SF 장르는 좀비, 우주나 외계인과 같은 미지의 세계를 대상으로 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친구, 가본 적 없는 땅은 곧 무한한 상상력과 흥미로움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이제 SF는 고개를 숙이고 <스미더린>에 빠진 사람들처럼 고개를 내려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살핀다. 손안에 가장 친숙하고 가까운 것들. 이름처럼 마치 거울을 대고 제 스스로를 요리조리 살펴보는 것 같다. <블랙 미러>는 미디어의 얼굴로 미디어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블랙 미러>를 시청하면서 가장 많이 연상됐던 것은 히치콕의 영화들이었다. 메시지도 다르고, 장르도 다르지만, <블랙 미러>와 히치콕은 분명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들이 사용하는 영상 연출 때문이었다. 히치콕은 집, 기차, 욕조와 같은 가장 친숙한 이미지 위에 음악, 표정, 카메라 기법 등을 통해 어딘가 어색하고 불안한 느낌을 쌓는다. 이런 연출은 별다른 서사 없이도 장면 자체로, 씬 자체로 심리적 불안감을 극대화시킨다. 분명 포근한 집은 더 이상 포근하지 않고, 설레는 여행길의 기차는 결코 설레지 않고, 피로를 씻겨주는 욕조는 피로는커녕 불안을 되레 확장시킨다.



언캐니 uncanny : 친밀한 대상으로부터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심리적 공포를 말한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논문에서 사용한 ‘섬뜩한’이란 뜻의 독일어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운하임리히는 ‘아늑하지 않은, 낯선’이란 뜻의 언홈리(unhomely)로 영역하기도 하지만, 프로이트의 의도를 고려하여 ‘이상한, 기이한’이란 뜻의 언캐니(uncanny)로 흔히 영역한다.
프로이트는 친숙함이 심리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하며 이 개념을 사용하였다. <새>, <싸이코>, <현기증> 등을 연출한 스릴러 영화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를 비평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히치콕과 마찬가지로 <블랙 미러>의 연출 역시 이 ‘친숙한 불편함’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익숙하다고 느꼈던 존재 속에 잠재된 공포 심리. 스마트폰이나 TV 등 지능형 단말기로 불려지는 이 도구들은 한때 인간이 충분히 제어 가능한 대상이었다. ‘사용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기계일 뿐이었다. 하지만 <블랙 미러>의 세계와 실제 현실은 다르다. 사용자의 욕망은 각종 유혹과 다수의 생활을 통해 결정되고, 왜곡되고, 강요받는다. 원하지 않아도 일상의 편리함을 위해서는 스미더린을 써야만 하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든 정보를 약탈당한다.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이 도구는 우리를 위협하고 두렵게 하는 존재가 된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는, 되레 단절과 오해를 일으키며 소통을 방해한다. 많은 것을 더 보고 듣고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는, 편협한 것만 보고 듣게끔, 많은 것들을 망각하게끔 사용자를 조종한다. 사적인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온 세상에 공개가 되고, 비밀 하나 없이 공개되어도 괜찮은 것들은 협소한 프레임 안에 갇혀 왜곡되고 분절된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구축한 회사 <스미더린>의 CEO 빌리 바우어는 말한다. "내가 시작했지만, 끝낼 방법도 없어요."




언캐니한 감상은 <블랙 미러> 시즌3의 <레이철, 잭, 애슐리 투>, 시즌2의 <돌아올게>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레이첼, 잭, 애슐리 투>는 팝스타 애슐리 O를 본떠 만든 인형이다. 작고 귀여운 장난감에 불과했던 애슐리 투는, 어느 순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는 개체로 진화한다. 애슐리의 몸은 없지만 그의 인격이 있고, 그의 뇌가 없지만 정확한 기억이 있다. 애슐리 투의 모습은 과연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경계를 무엇으로 두어야 하는지 질문한다. 애슐리 투가 애슐리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슐리가 아닌 것은 또 아니니까.




친밀하면서도 두려운 감정은 <블랙 미러> 시즌2의 <돌아올게be right back>에서 더욱 또렷하게 나타난다. 남편 애쉬를 잃고 큰 시련에 빠진 아내 마사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누군가 추천한 웹사이트에 접속한다. 그곳은 남편 애쉬가 SNS에서 사용했던 모든 말들을 모으고 조립하여 대화가 가능한 가공의 애쉬를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사용하는 단어부터 목소리까지, 남편을 쏙 빼닮은 존재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남편 애쉬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가공의 애쉬에게 푹 빠졌던 마사지만, 가공의 애쉬는 결코 진짜가 될 수 없었다. 그 간극을 발견할 때마다, 마사와 관객은 가공의 애쉬가 진짜를 흉내 낼 때마다 불쾌하고 오싹한 기분을 느낀다. 마치 인간을 쏙 빼닮아 무척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불편한 공포감을 주는 구체관절 인형이나 로봇 기계처럼, 진짜가 될 수 없는 가짜의 진짜 같음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익숙함과 불편함의 감정이 어지럽게 반복된다.





영화는 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다룬다
- 크라카워


<블랙 미러> 새로운 공포나 자극을 주는 드라마가 아니다. 단지 매일 예감하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있는 일상의 불안과 외로움, 야기될 공포와 두려움의 현장을 기꺼이 꺼내놨을 뿐이다. 모든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자신의 실수로 약혼자를 잃어버린 <스미더린>의 크리스의 이야기가 멀지 않고, 두 번 다시 아내를 외롭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맹세하는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대니의 다짐이 익숙하다. 하지만 크리스와 대니를 구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집이   없는 공간에서의 삶은 계속되고, 공간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출발지점도, 도착지점도 모두 잃어버린, 종료 버튼을   없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임과 같은 세상.


끝내는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세계에 두 눈을 고정한 채 끝없이 이어진 뫼비우스의 띠를 걷는다. 이 세계를 끝낼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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